지브리 팬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한 가지 질문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동산인가요 부동산인가요?
청년 주거 문제가 심각한 한국에서 이만큼 중요한 질문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동산인지 부동산인지에 대한 여러 견해를 조사한 결과 전반부는 동산이지만 준부동산인 자동차관리법상 자동차(캠핑용 자동차 혹은 캠핑용 트레일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설득력 있게 느껴집니다.
청년들이 부동산을 마련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세상입니다. 저도 어렸을 적부터 어른이 되었을 때의 제가 별도의 재테크나 투자 없이 거주를 위한 부동산을 가질 수 있을까 걱정에 시달리며 살아왔는데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가진 매력은 그런 걱정을 벗어난 (부)동산을 가진 멋진 왕자님이 하늘에서 날아온다는 환상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즐거운 하루 되세요!
농담입니다. 진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었어.
그런데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은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오늘 이야기 할 내용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원래 호소다 마모루가 기획하고 만들고 있던 작품이었습니다. <모노노케 히메>를 만들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해버려, 지브리에서 외주 감독으로 호소다 마모루를 고용한 건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터집니다. <모노노케 히메>에 모든 열정을 쏟아붓고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다’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면서 새로운 기획을 들고 지브리 스튜디오로 돌아온 겁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제작이 시작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돌아와버리는 바람에 지브리의 모든 자원과 인력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로운 기획에 집중되고, 고용 감독이었던 호소다 마모루는 뒷전이 되고 맙니다. 자기가 데려온 사람들에게 월급조차 제대로 줄 수 없게 된 호소다 마모루는 결국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남겨둔 채 떠나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 기획은 붕 뜨고 말아서, 결국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완성한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발적으로 추진한 기획은 아니었던 셈이죠.
이 사건은 대단히 복잡하게 흐른 사건이라, 호소다 마모루가 제 발로 지브리를 나간 건지, 아니면 윗선에서의 압력으로 인해 강판을 당한 건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누구는 강판을 당한 것이라 하고 누구는 제 발로 떠난 거라고 말하기 때문에 무엇이 사실인지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호소다 마모루 모두를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끝마치고 쉴 새도 없이 호소다 마모루가 남기고 간 <하울의 움직이는 성> 기획에 들어가야 했고, 호소다 마모루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복귀할 때까지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지내야만 했으니까요.
재밌는 것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호소다 마모루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장면들이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영화라는 게 인생의 일부를 온전히 할애해야만 만들 수 있는 것이니만큼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보여주고 싶었지만 보여주지 못했던 것들을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죠.
아무튼 그렇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기획이 시작됩니다. 기획에 탑승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호소다 마모루가 준비하던 모든 것들을 폐기해 버리고는 원점으로 돌아가 애니메이션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작품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 원작자 다이애나 윈 존스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요, 다이애나 존스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작품을 ’작품의 안과 밖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결과물은 원작과 판이하게 달랐지만 원작자 다이애나 윈 존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극찬했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작품이 맞다면서요.
다만 원작자의 반응과는 달리 세간에서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평가는 호불호가 크게 갈렸습니다. 전작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만장일치에 가까운 호평을 받았던 것과 대비되지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 된 이유 중 하나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화면도 예쁘고 음악도 아름답고 분명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평가가 줄을 이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이 - 드디어 - 대중과 엇박자를 일으키기 시작한 겁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서 마법은 대단히 모호하게 그려집니다. 묘사는 일관적이지만 구체적인 원리를 설명해주지 않아서 마법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직관을 통해 이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황야의 마녀가 소피에게 저주를 걸었으니 저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작 이 저주가 무엇이고 어떻게 풀 수 있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으니, 관객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황야의 마녀가 소피에게 저주를 걸었는데 소피가 늙어버렸으니 황야의 마녀가 소피에게 늙게 만드는 저주를 걸었구나 하게 되기 마련이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보게끔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고 싶은 관객이라면 여기서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황야의 마녀가 건 저주가 정말로 소피를 늙게 만드는 저주일까? 원작에서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는 그 내용이 딱 맞아 떨어진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 저주는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니까 하울에게 부탁해보던지”
이게 황야의 마녀가 소피에게 알려준 저주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저주는 타인에게 말할 수 없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여기에 숨겨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 마법과 저주의 공통점은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마법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마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마법이 이해된다면, 그것은 마법이라기보다는 과학이라 하는 게 맞겠지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작품 속 마법과 저주의 모호성이, 마법과 저주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여하튼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저주 때문에 소피는 하울을 만난 뒤에도 자신이 저주에 걸렸고 그걸 풀기 위해 하울을 만나러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빙글빙글 돌기만 하다 결국 하울 성의 청소부로 취직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 쉬운 한 마디를 하지 못해, 둘의 관계가 복잡해져 가는 것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요 관전 포인트겠지요.
우리는 소피의 욕망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소피의 욕망은 저주를 푸는 겁니다. 저주를 타인에게 얘기할 수 없다는 제약 때문에 하울의 곁에 머무르게 되긴 했지만요. 소피는 저주를 풀어달라는 얘기를 하지 못해 하울의 주변을 머무르면서 저주를 풀 기회를 노리면서 방법을 찾습니다. 하울이 자신의 저주를 발견하고 풀어주길 바라면서요. 그런데 여기서 잠시 관점을 돌려봅시다. 만약 이런 저주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소피만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그리고 하울이 바로 그런 처지의 사람이라면요?
하울에 대해 이야기를 해봅시다. 하울은 멋쟁이입니다.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며 책임감이 없는 젊은이들을 훈계하고 풍자하기 위한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많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들이 젊은이들을 훈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구요.)
하지만 하울의 진짜 정체성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쫓기는 자입니다.
앞으로는 황야의 마녀가, 뒤로는 (하울의 스승인 설리만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하울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울을 노리는 이유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습니다. 황야의 마녀가 원하는 것은 하울의 심장이며, 국가가 원하는 것은 하울의 마법적 재능(의 군사화)입니다. 그리고 하울의 압도적인 마법이 하울의 심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둘이 노리는 것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장의 정체는 바로 캘시퍼입니다.
캘시퍼는 작품 속 여러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캘시퍼는 소피를 보자마자 저주에 걸렸다는 걸 알아채고 골치 아픈 저주에 걸렸구만 소피에게 제안을 합니다. ‘내 계약의 비밀을 알아내면 이 저주는 풀려. 내 저주를 풀어주면 네 저주도 풀어줄게’ 캘시퍼가 소피를 보자마자 소피가 저주에 걸렸다는 걸 간파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장면은 어쩌면 하울이, 소피를 보자마자 저주에 걸렸다는 걸 간파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세계의 원리를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실체를 간파하는 것
이는 저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를 간파하는 것’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중요한 모티프입니다. 계약은 조건을 알아내면 파기 가능합니다. 마법은 실체가 간파되는 순간 풀립니다.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체를 이해하는 것으로 풀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바로 여기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제도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피날레에서, 무대가리가 저주의 관념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세계에서 저주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쉽게 풀 수 있습니다. 고작 사랑의 키스 한 번이면 끝날 일이었으니까요. 이렇게 터무니 없을 정도로 쉽게 풀 수 있는 저주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타인에게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덧붙여서, - 진짜 문자 그대로의 왕자님인 - 무대가리가 소피의 짝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소피가 저주의 실체를 간파하고 키스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대가리에게 소피가 선물한 키스는 어디까지나 희생에 대한 호의의 표현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대가리는 소피의 짝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울이 소피에게 진심을 다하지 않는다면, 소피가 언제고 하울을 내칠 수 있게 해주는 캐릭터란 게 재밌네요.
그렇다면 하울은 어떤 저주에 걸린 것일까요? - 작품은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지만 우리에겐 추론이라는 위대한 도구가 있습니다. - 마법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인간성을 잃고 괴물이 되어가는 저주에 걸렸다고,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슬슬 작품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은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 버전의 <미녀와 야수>라는 거지요.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하울은 별을 삼켜 악마와 계약을 했습니다. 그 계약의 대가로 심장이 분리되었고, 마법을 사용할수록 점차 괴물이 되는 저주에 걸렸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울의 실체는 괴물이기 때문에, 하울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멋진 외모에 집착합니다. 꾸미기 위한 금발이 원래 머리 색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멘탈이 나가 모두를 위협에 빠뜨릴 정도입니다. 이 장면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하울의 아름다움은 괴물이라는 실체를 감추기 위한 위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결국 이런 비정상적인 외모 집착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저주의 실체입니다. 하울은 마법 때문에 괴물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괴물이 되고 있단 콤플렉스 때문에 더 멋쟁이로 꾸미고 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하울이 저주 걸린 괴물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하울이 괴물이라는 소문이 돌긴 하지만, 사람은 보이는 것을 믿게 되기 마련입니다. 노골적인 복선으로, 소피의 동생이 말합니다. “만약 하울이었다면 언니의 심장을 먹었을 걸?” 하지만 사람은, 우리는 보이는 것만을 믿기 때문에 ‘과장된 소문이구나’ 하고 넘어가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렇잖아요?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함께 하늘을 날아다니던 - 꿈에서 나올 것만 같은 - 이 아름다운 미남이 사실은 괴물이라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미녀와 야수>를 비튼 이야기라는 것조차도 선뜻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미녀와 야수> 속 괴물과 달리 하울의 겉모습은 괴물이 아니니까요.
자 여기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작품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보이는 대로만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소피가 늙은이가 되는 저주에 걸려, 그 저주를 풀기 위해 하울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 너머의 이야기에 관점을 둔다면 이 이야기는 정반대로, 사실 저주에 걸린 하울이 그 저주를 풀기 위해 소피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저주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초반부에 소피가 걸린 저주는 단순히 나이 들게 만드는 저주가 아닐 거라고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가장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설리만과의 대화 장면만 봐도 그렇습니다. 하울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소피는 다시 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피의 저주는 단순히 나이를 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나이를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작품의 두 가지 핵심 키워드, 즉 인간의 내면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생각한다면 저주의 내용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눈에 보이는 외모로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게 설득력을 가지니까요.
소피는 어려서부터 장녀로서 모자 가게를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누른 채 모자가게에서 애늙은이처럼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내면도 늙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소피가 하울을 만나 사랑을 깨달아갈수록 소피는 점차 젊어집니다. 애초에 소피는 저주를 풀기 위해 하울을 만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울과의 사랑이 도움이 되었을 순 있지만,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던 거죠.
하지만 하울은 아닙니다. 애니메이션의 피날레에서 밝혀지듯이, 하울의 계약 장면(별을 삼키는 모습)을 본 유일한 인간은 소피였기 때문에 오로지 소피만이 하울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습니다. 소피는 어떻게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었던 걸까요?
바로 소피에게 ’찾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는 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반지는 왕궁에서 하울의 스승을 대면했던 소피가 움직이는 성으로 안전히 돌아갈 수 있게끔 하울이 선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마법이란 게 내면에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들어주는 식으로 이뤄집니다.
클라이막스 속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소피가 캘시퍼에게 물을 뿌린 후, 하울이 죽어가게 되자 소피는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진심을 담아 찾았고, 반지는 그 바람에 따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즉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알려준 겁니다. 추론의 힘을 통해 이 세계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난해함의 극치일 수밖에 없는 장면입니다.
이런 소피의 진심 덕분에 소피는 하울의 진실을 알게 됩니다. 하울은 위대한 마법사가 되고자 별을 삼켰고, 그 결과 저주에 걸렸습니다. 소피는 이 광경을 보고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고, 여기서 소피는 하울이 저주를 풀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돌아다니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사실 소피를 찾아 방황하던 것이었습니다. 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오브제 자체가 작품의 숨은 구조를 은밀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겉으로 보아서는 소피가 저주를 풀기 위해 성으로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실체를 알고 보면, 하울이 저주를 풀기 위해 성을 끌고 소피를 찾아가는 이야기였던 거니까요!
이제 이야기는 소피가 하울을 처음 만나는 순간으로 돌아갑니다. 껄렁한 마법사 ’하울’이 소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겁니다. ’한참 찾았잖아’라고. - 이 대응 구조는 얼마 전에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며 꽤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 이 장면을 유심히 보시면 하울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장대한 삽질을 통해 소피는 마침내 하울이 걸린 저주의 실체를 알게 되고, 마침내 하울을 구원하는데 성공합니다. 결국 하울은 저주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인간이 됩니다.
결국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이야기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내면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소피는 하울을 처음 만났을 때, 하울의 겉모습과 우아하고 환상적인 마법 때문에 하울의 내면(=저주에 걸린 괴물)을 보지 못합니다.
소피는 본인이 저주에 걸리고서야 비로소 하울과의 관계가 시작되고, 나아가 하울에 대한 이해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하울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은 하울의 실체, 즉 괴물(야수)을 조우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하울의 밑바닥을 보고 나서야 소피는 진정으로 하울을 ’이해’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저주에 걸린 채 살고 있지만 그 저주가 무엇인지 타인에게 얘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채 홀로 앓으면서 살아가는 거죠. 그 저주는 트라우마일수도 있고, 콤플렉스일수도 있으며, 남들에게 얘기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비밀일수도 있습니다.
저주의 가장 고통스러운 점 중 하나는 그 저주의 실체를 남들에게 얘기를 하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끙끙 앓으며 저주의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모두에게 걸린 저주인 겁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타인에게 이해를 받고 싶어하지요. 그런 저주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우선 타인의 저주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다가가서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