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신은 고양이2: 끝내주는 모험>은 ’이 이야기는 동화입니다(This story is a fairy tale)’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됩니다. 한국어 자막으로는 ’이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라 동화입니다’라고 번역되었는데, 이게 옳은 번역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원문이 가지고 있던 ’Fairy tale’의 뉘앙스를 잘 살리지 못한 번역이 아닌가 싶거든요.
만약 Fairy Tale을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라 본다면 <장화신은 고양이2: 끝내주는 모험>은 시작부터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장화신은 고양이2: 끝내주는 모험>은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라기엔 폭력적이고 난해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이 이 영화를 봐선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삶의 소중함’이라는 영화의 주제는 어린이들보다는 어른들에게 더 통하는 면이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영화가 ’이 이야기는 동화입니다’라고 선언하며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나는 이 영화가 동화의 구조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화의 구조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널리 알려진 동화를 가져와서 비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동화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화는 ’개연성’이라는 것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일반적인 픽션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별이 있다’고 한다면 그 별이 어떻게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지, 그 원리부터 파고들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동화는 다릅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별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구체적인 원리나 방식을 파고 들지 않아도 허용됩니다. 동화는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장화 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은 ’이 이야기는 동화입니다’라고 선언함과 동시에 소원을 들어주는 별이 지상에 떨어져, 숲을 검게 물들였으며, 그 중심에서 소원을 비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제로 던지고 시작됩니다. 이런 ’자유로움’이야말로 동화의 미덕 중 하나가 아닐까요.
다른 하나는 ’Fairy tale’의 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만약 Fairy Tale을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라 본다면 <장화신은 고양이2: 끝내주는 모험>은 시작부터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 셈”이라 했는데, 이는 Fairy tale이라는 단어가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화라는 매체를 정립한 작가들로는 프랑스의 ‘샤를 페로’, 독일의 ‘그림 형제’ 그리고 덴마크의 ’안데르센’이 대표적입니다. 그림 형제가 수집한 ’메르헨(Märchen)’의 경우, 흔히 ’동화’로 번역되지만 사실 ’작가를 알 수 없는 옛날 이야기’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그림 형제가 수집한 이야기들 중에는 ’잔혹동화’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이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애초에 동화라는 것이 어린이들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림 형제 동화집 같은 경우 ’동화’라기보다는 ’민담’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봅시다. 위에서 열거한 세 작가 가운데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을 이야기하는데 가장 중요한 작가라면 샤를 페로일 겁니다. 애초에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의 원전 <장화 신은 고양이>를 발표한 작가가 바로 샤를 페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샤를 페로가 동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재밌습니다.
샤를 페로는 언제부터인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엇도 샤를 페로를 즐겁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샤를 페로의 조카딸이 찾아와서 우울증을 치료해줄 테니 멋지게 차려 입은 뒤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습니다. 샤를 페로는 한숨을 쉬면서도 우울증을 치료할 그럴듯한 방법이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조카딸이 시키는 대로 의복을 입고 조카딸을 따라갔습니다. 조카딸은 페로를 파리 시내, 리슐리외 거리에 있는 한 저택으로 데려갔습니다. 이 저택에는 숨겨진 방이 있었는데, 이 숨겨진 방의 정체는 랑베르 후작 부인이 운영하는 화요 살롱이었습니다.
랑베르 후작 부인의 초대를 받은 작가 ‘마리-카트린 도느와’ 남작 부인이 핑크색 슬리퍼를 신은 채 살롱에 들어와 신작 원고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공주와 사악한 계모가 등장하는 마리-타크린 도느와 남작 부인의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의 연속이었고, 이는 샤를 페로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어떻게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샤를 페로가 조카딸을 따라 나서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자책하고 있는데 핑크색 슬리퍼를 신은 작가가 이야기를 끝맺기 위해 말했습니다.
“Un parfait bonheur(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 문장을 듣는 순간 샤를 페로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에 휩싸였습니다. 비관적인 생각은 가시고, 삶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습니다. 혹시나 이 감정이 일시적인 것은 아닐까 기다려보았지만 이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샤를 페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카트린 도느와 작가에게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샤를 페로는 이 기적 같은 우울증의 치유법을 사람들에게 퍼뜨려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치유법에는 다양한 이름이 있었지만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conte de fée(콩 드 페)’ 즉 ’Fairy tale(요정 이야기)’였습니다.
오늘은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이라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자리이지 샤를 페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에, 샤를 페로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토록 장황하게 샤를 페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요정 이야기’가 어떤 이유로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는지를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자와 공주, 마법과 요정의 이야기를 다루는 ’요정 이야기’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잠시 현실을 떠나 비관적인 생각을 치유하기 위해 퍼져나가게 되었다는 것을요.
<장화신은 고양이2: 끝내주는 이야기>는 영웅담입니다. 주인공 ’장화신은 고양이’가 영웅으로서 완성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밌게도 장화신은 고양이는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이미 명성이 자자하여 영웅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영웅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두려움 없이 모험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모험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는 고양이이기 때문입니다.
장화신은 고양이가 이미 여덟 번의 목숨을 소진하여 단 한 개의 목숨만 남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장화신은 고양이는 더 이상 두려움 없이 모험을 즐길 수 없게 됩니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장화신은 고양이는 영웅의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애초에 장화신은 고양이는 진짜 영웅이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의 영웅적 덕목이었던 ’용기’는 사실 여러 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만용’이었기 때문이지요.
검은 숲에서의 여정은 장화신은 고양이가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기 위한 통과의례로서의 시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납니다. 애초에 ’영웅’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영웅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영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마블과 DC는 ’히어로물’을 이끄는 양대산맥입니다. 재밌는 것은 (적어도 영화 매체에서) 마블과 DC는 영웅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마블을 이끄는 케빈 파이기와 DC 영화를 이끌었던 잭 스나이더가 생각하는 영웅의 정의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케빈 파이기와 잭 스나이더의 상반된 영웅관은 영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관점을 보여줍니다.
우선 잭 스나이더의 영웅관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잭 스나이더에게 영웅이란 초인적인 힘과 능력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존재입니다. 잭 스나이더의 영웅관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영웅관과 맞닿는 지점이 있는데,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 초인적인 힘과 능력을 신의 자손으로서 타고나는 것처럼 잭 스나이더의 영웅 또한 초인적인 힘과 능력을 선천적으로 타고납니다. 이들은 존재 자체만으로 이 세상에 대한 축복으로 여겨집니다.
반면에 케빈 파이기의 영웅관은 보다 현대적입니다. 케빈 파이기에게 영웅이란 공동체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입니다. 마블 영화에서 영웅이 ’진정한 영웅’으로 완성되는 순간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입니다. 아이언맨은 수트를 포기함으로서 진정한 영웅이 되고, 토르는 묠니르와 아스가르드를 포기함으로서 진정한 영웅이자 지도자가 되는 것처럼요.
’영웅’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잭 스나이더의 것보다는 케빈 파이기의 것에 더 가깝습니다. 사실 잭 스나이더의 영웅관은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유별나다고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이것이 DC 영화가 마블 영화에 비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의 영웅관 또한 잭 스나이더의 것보다는 케빈 파이기의 것에 더 가깝습니다. 장화신은 고양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고 자유롭게 모험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에 그에게는 아홉 개의 목숨이 있어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그가 마지막 목숨을 살게 되면서 희생할 것(목숨)이 생겨나자 그는 영웅을 은퇴하고 맙니다. 결국 이는 지금까지의 장화신은 고양이가 희생을 감내하지 않는 가짜 영웅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의 클라이막스가 감동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타고난 목숨을 통해 만용을 부릴 뿐이었던 가짜 영웅, 장화신은 고양이가 마침내 희생을 감내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소원을 이뤄주는 별을 통해 목숨을 늘릴 수 있었지만, 그것을 악용할 여지가 있는 악당(잭 호너)의 손에 이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자신의 소원을 희생하기로 합니다. 이를 통해 장화신은 고양이는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되지요.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은 오랜 침체에 빠져 있던 드림웍스가 다시 재기할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데에서 그 성취가 크다 할 수 있겠습니다. 드림웍스는 한때 디즈니의 경쟁사로 여겨지기도 했는데요, 꽤 오랜 기간 동안 침체기에 빠지며 이제는 디즈니의 라이벌이었단 것도 옛말이 되어버리고 말았지요.
디즈니가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대중의 지지를 잃기 시작한 타이밍에, 드림웍스가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을 통해 다시 재기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드림웍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은 그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을 오래간만에 증명한 훌륭한 영화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덧붙여서 - ’장화신은 고양이’라는 제목은 맞춤법이 틀렸습니다. ’장화 신은 고양이’라 써야 맞거든요. 이 글을 쓰면서도 맞춤법을 따라 ’장화 신은 고양이’라 쓰는 게 맞을지 정식 제목을 따라 ’장화신은 고양이’라 써야 맞을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은 ’장화신은 고양이’로 원전인 동화는 ’장화 신은 고양이’로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