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톱모션의 몰락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1991년, <쥬라기 공원>을 준비하고 있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한 상영관에서 5초짜리 데모 영상을 보고 말합니다. ‘결정했어요. 우린 저걸 쓸 겁니다.’
스필버그가 말한 ’저것’은 컴퓨터 그래픽을 뜻합니다. 스필버그의 이 말과 함께, 스톱모션 기술의 쇠퇴가 시작됩니다. 상상력을 현실로 구현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였던 스톱모션 기술이 구닥다리가 되어 컴퓨터 그래픽(CG)이라는 신기술에 밀려나게 되는 순간이었죠.
본래 <쥬라기 공원> 속 멸종된 공룡들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과 애니메트로닉스를 통해 구현될 예정이었습니다. <스타워즈>에서 스톱모션을 담당했던 필 티펫이 공룡의 스톱모션 파트를 맡고, <터미네이터>와 <에일리언 2>에서 애니메트로닉스 기술을 담당했던 스탠 윈스턴이 공룡의 애니메트로닉스 파트를 맡아 두 기술을 조화롭게 이용해서 멸종된 공룡을 스크린 위에 구현한다는 구상이었죠.
하지만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더 사실적으로 공룡의 모습을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스필버그는 스톱모션 대신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스톱모션 기술자 필 티펫은 큰 충격을 받았고, 폐렴에 걸려 열흘 가까이 침대에 누워 지냈다고 합니다. 훗날 스필버그는 필 티펫에게 ’스톱모션 대신 컴퓨터 그래픽을 쓰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느냐’고 질문했고, 이에 필 티펫은 ’내가 멸종하는 기분이었다’고 대답했다고 하죠. 스필버그는 이 대사를 영화 속에 삽입했고요.
스톱모션의 쇠퇴와 컴퓨터 그래픽의 부흥은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쥬라기 공원>이 나오기 전에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영화 <어비스>와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을 만들면서 컴퓨터 그래픽의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기 때문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피사체를 한 프레임씩 촬영하여 움직임을 부여하는 스톱모션 기술은 모션 블러의 부재 탓에 스톱모션 특유의 ‘삐걱거리는’ 느낌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컴퓨터를 통해 모션 블러를 넣는 기술이 개발되기도 했지만(이것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필 티펫이고, 이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가 바로 쥬라기 공원의 컴퓨터 그래픽을 담당하게 되는 ILM입니다) 특유의 삐걱거리는 느낌을 극복하기는 어려웠다나 봅니다. 결국 스톱모션 기술은 사실성 측면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이길 수 없었고,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스톱모션 기술은 주류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물론 스톱모션 기술이 일제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숀더쉽>, <윌레스와 그로밋>의 아드만 스튜디오, <유령신부>, <코렐라인>의 라이카 스튜디오에서는 여전히 훌륭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계보를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스톱모션 기술의 몰락을 목격했던 필 티펫 또한 30년간 <매드 갓>이라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스톱모션 기술이 다시 인정을 받게 될 날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 결과, 2020년대에 이르러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윈델 & 와일드>, <매드 갓>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를 통해 메인스트림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기에 이르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메타적인 영화입니다.
무생물인 피노키오가 생명을 얻어 움직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피사체들을 촬영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스톱모션 기술을 연상시킵니다. 스톱모션 특유의 삐걱거림과 사실과 비슷한 듯 다른 움직임은 삐걱거리며 움직이면서 사람과 비슷한 듯 다르게 움직이는 피노키오의 움직임과 유사한 면이 있지요.
피노키오
“전 피노키오에요. 전 남자아이죠. 아무래도 제가 죽었나 봐요.”죽음
“그래, 알겠다. 빌린 영혼을 지닌 나무 소년. 내 동생이 저지른 실수로군. 감상적인 바보 같으니. 그 애가 네게 생명을 줬는데 넌 생명을 가질 존재가 아니야. 의자나 탁자에 생명이 없듯이. 그래서 넌 진정으로 죽을 수도 없는 거야.”피노키오
“그거 좋은 거죠?”죽음
“다시 말하자면 넌 절대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어. 카를로 같은 인간 아이는 될 수가 없지. 인간의 삶이 귀하고 의미 있는 건 그 삶이 짧기 때문이야. 오해는 하지 마라. 넌 죽을 거야. 그것도 아주 여러 번. 이번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건 진짜 죽음이 아니야. 그저 기다리는 시간이지. 세상엔 규칙이란 게 있어. 내 동생은 그걸 무시하지만 말이야. 우린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넌 여기 내 곁에서 기다려야 하고. 그 기간은 매번 더 길어질 거다. 시간이 다 될 때까지.”
피노키오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후세계에 가게 되었을 때, ’죽음’이 피노키오에게 “넌 생명을 가질 존재가 아니야. 의자나 탁자에 생명이 없듯이“라고 말하며 모래 시계를 보여주는 장면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스톱모션 기술은 움직이지 않는 피사체를 연속적으로 촬영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사물에 ’시간’을 더해 ’생명’을 창조하는 기술인 셈이지요. 그래서 이 장면은 피노키오가 스톱모션 기술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어째서 스톱모션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기예르모 델 토로와 스톱모션 기술자들 나름대로의 답변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2020년대에 와서 스톱모션 기술이 다시 주목 받게 된 이유는 ’피노키오는 인간이라 볼 수 있는가?’라는 영화 속 질문과 맞닿은 지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스톱모션 기술이 다시 주목 받게 된 이유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너무나도 발전함에 따라 ’인간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은 모든 것을 구현 가능합니다. 이제는 컴퓨터 그래픽이 구현하지 못하는 것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의 발전은 컴퓨터 그래픽을 시시해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트럭이 뒤집어지는 장면을 만들었다고 하면 시시하게 느껴지는 반면에 실제로 트럭을 뒤집어서 촬영했다고 하면 놀랍게 느껴지는 시대가 오게 된 겁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카를로가 피노키오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요.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가 놀라운 이유는 이 영화가 단지 스톱모션 기술에 대한 메타적인 코멘터리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누가 보아도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입니다. 실제로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 영화를 <악마의 등뼈>, <판의 미로>와 함께 삼부작 영화로 여기고 있다 말하기도 했죠.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에 나타난 기예르모 델 토로의 모티브를 정리해보겠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모티브 중 하나는 ’부자 관계’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에서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중요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영화화를 맡은 <헬보이> 시리즈에서 트레버 박사와 헬보이의 관계는 (원작과 달리) 부자 관계로 묘사됩니다.
<악마의 등뼈>에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지만) 내전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카를로스가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판의 미로>에서는 권위적인 파시스트 양아버지 비달 대위와 그 딸 오필리아의 관계가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주인공, 스탠턴 칼라일의 원죄 또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고전을 가져오되,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해석의 방법도 뚜렷한데, 인간 중심적인 텍스트를 탈인간 중심적으로 뒤집는 것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대표작 <판의 미로>는 아서 매켄의 소설 <위대한 신, 판>을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초기 코즈믹 호러 소설 중 하나로 여겨지는 <위대한 신, 판>은 원초적이고 야만적인 신(혹은 악마) ’판’에게 홀린 여성이 주변 사람들을 타락시키가다 결국 퇴치 당하는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 이야기를 뒤집어, 순수함을 가진 소녀 오필리아가 비정하고 가부장적인 파시즘에 희생되는 이야기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고전 영화 <검은 늪지대의 생명체(검은 산호초의 괴물)>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라는 사실은 영화광들 사이에서는 널리 잘 알려져 있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어려서부터 이 영화를 좋아했는데, 케이 로렌스와 괴물 사이의 로맨스가 이루어지지 않고 끝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셰이프 오브 워터>를 만들었다고 하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프랑켄슈타인의 열광적인 팬이라는 사실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 중 하나가 프랑켄슈타인 모티브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것은 메리 셸리이지만, 우리가 ’프랑켄슈타인’하면 떠오르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이미지를 완성한 것은 제임스 웨일 감독의 1931년 영화 <프랑켄슈타인>입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이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프랑켄슈타인>의 모티브를 적극적으로 작품 내에 끌어들이곤 합니다(소설 그대로가 아니라 제임스 웨일에 의해 가공된 <프랑켄슈타인>을 말입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셰이프 오브 워터>인데 주인공 엘라이자의 이웃이자 이야기의 화자이기도 한 ’자일스’는 노골적으로 제임스 웨일을 모델로 한 캐릭터입니다. 자일스는 제임스 웨일처럼 동성애자이며, 예술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독 제임스 웨일의 이야기는 <갓 앤 몬스터>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이안 맥켈런이 제임스 웨일을 맡아 연기했죠.)
글을 읽으면서 정작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것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더 덧붙일 이야기가 없을 정도로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의 텍스트만으로 글을 쓰면 누구나 떠올리고 이야기 할 수 있을 내용의 글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만큼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가 이야기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가 이토록 뚜렷한 메세지를 가진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좋은 작가가 좋은 원작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를 보는 저는 이제 더 이상 기예르모 델 토로의 것이 아닌 피노키오를 상상하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자기반복적인 작가라서가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모두 느슨하게 연결된 하나의 작품 세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분명 디즈니가 각색한 <피노키오>에 비해 음산합니다. 그러나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속 음산한 분위기나 내용들은 사실 카를로 콜로디의 원작에도 나타나던 것들입니다. 어쩌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가 디즈니가 각색한 <피노키오>보다 원작 동화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