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전, 이 나라는 깊은 숲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곳에는 태곳적부터의 신들이 살고 있었다.”
오늘 이야기를 할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 필생의 라이프워크라 할 수 있는 작품. <모노노케 히메>입니다.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태주의적인 관점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 발도 물러날 수 없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그리고 있지요.
하지만 오늘은 그런 생태주의적인 관점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보려 합니다. <모노노케 히메>가 일본사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관점을 나타낸 작품이라는 전제 하에 작품의 요소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방식으로 <모노노케 히메>를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노노케 히메>의 기본 전제는 ‘인간과 자연의 이항대립’입니다. 인간이 숲을 개척함에 따라 자연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또한 ’살기 위해서’ 자연을 개척해야만 합니다. 그 사이에서 동물의 모습을 한 신들은 죽임을 당하고, ’재앙신’이 됩니다.
’재앙신’이 된 자연은 인간의 세계에 말 그대로의 재앙을 몰고 오지만, 그 재앙에 휩쓸리는 이들은 인간계의 변방에 위치한 약자, 소수민족, 농민들입니다. 자연의 분노는 ’아래쪽’을 향합니다. <모노노케 히메>의 세계가 디스토피아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러운 인간들이여.. 나의 고통과 원한을 알지어다..”
<모노노케 히메>의 서막을 알리는 나고의 유언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본래 <모노노케 히메>의 제목으로 염두에 두었던 제목은 <아시타카 전기>였습니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를 뜻하는 한자를 ’귀에서 귀로 전해진 이야기’로 바꾸어 새로운 한자를 만드려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제목에 새로운 한자를 집어넣게 되면 마케팅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생각했던 제목은 기각되었고, ’산’이라는 캐릭터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 <모노노케 히메>라는 제목이 지어집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포커스를 주고 강조하고 싶었던 인물은 ’산’보다 ’아시타카’였다는 점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제목은 거의 대부분이 영화의 주인공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산’의 존재감이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에 ’아시타카’의 존재감이 묻히는 감이 있지만, 아시타카야말로 ’신화적 존재’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아시타카와 산의 이야기가 일본의 소수민족 ’아이누족’의 기원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먼 나라에서 온 왕자가 하얀 들개와 혼인하여 아이누족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민족 기원담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데, 한국에서도 하늘의 자손이 내려와 곰과 혼인하여 ’단군’이라는 임금을 낳은 것과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상상력을 덧대어 만든 작품이 <모노노케 히메>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아시타카의 출신에 대해 이야기를 해봅시다. 아시타카는 극중에서 ’에미시 부족’의 일원으로 소개됩니다. 작품은 에미시 부족에 대해 잘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이들이 어떤 부족인지 놓쳐버리기가 십상입니다.
아시타카가 속해있던 부족 ’에미시’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역사를 한 번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고대 일본에는 선주민들이 있었고, 이들은 ’조몬’이라 불리는 수렵, 채집 문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조몬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 중 하나인 ‘조몬 토우’ 입니다. 조몬인들은 신석기 시대 수준의 문화를 유지하며, 수렵, 채집, 어로를 통해 생활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조몬인들은 자연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즈음하여 이러한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3세기 즈음해서 한반도로부터 금속제 도구와 무기를 든 채 벼농사를 짓는 농경인들이 일본으로 유입되기 시작합니다. 이들을 ’야요이’인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금속제 무기를 통해 조몬인들을 몰아내고 일본 열도에서 조금씩 세를 키워나가기 시작합니다.
기원후 3세기 즈음해서 이들은 ’야마토’라 불리는 통일 왕조를 세우게 되고, 이것이 현재 일본에서 주를 이루고 있는 ’야마토 민족’을 탄생시킵니다. 우리 익히 아는 ’일본’의 이미지는 바로 이 야마토 민족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사에는 늘 이면이 존재했습니다. 일본의 역사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덴노(천황)’와 ’쇼군’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으실 겁니다. 일본은 본래 덴노가 직접 다스리는 나라였지만 점차 실권이 ’쇼군’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쇼군은 ’세이이타이쇼군’ 즉 ’정이대장군’의 약자입니다.
정이대장군은 곧 ’오랑캐를 정벌하는 장군’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일본사의 이면이 드러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오랑캐’를 토벌하면서 세를 확장해온 나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오랑캐’는 즉 아이누족(과 그 조상들)을 뜻합니다. 이 아이누족과 그 조상들이 바로-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면서 자연과 어우러진 채 살아왔던 일본 열도의 선주민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들은 독특한 양식과 패턴의 옷을 입고 수염이 덥수룩하다는 특징이 있었는데, <모노노케 히메> 속 에미시 부족도 마찬가지의 묘사가 나타납니다.
오프닝은 짧지만 굵게, 아시타카의 부족이 처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아시타카의 부족이 사는 마을은 험난한 언덕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시타카가 재앙신과 싸우는 장소도 꽤나 가파른데, 이런 지형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기에는 많이 열악합니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아시타카의 부족이 어떤 식으로 농사를 짓고 사는지도 짧게 지나가는데, ’벼’를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조’와 ’피’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결국 야마토 민족에게 패배 변방으로 밀려나, 자취를 숨긴 채 화전을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부족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디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해왔을 이들이지만 야마토 민족에게 패하고 밀려나 험난한 지형에서 원시적인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던 이들에게, 훗날 부족장이 되어 부족을 이끌었어야 했을 아시타카가 저주에 걸려 마을에서 추방 당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큰 손실이었을 겁니다.
아시타카는 마을을 떠나기 전, 상투를 자릅니다. 이는 아시타카의 부족이 ‘자취를 감춘 채 숨어서 살고 있는’ 부족이기 때문인데, 한 번 마을을 떠났던 이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없다는 계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곧 이 공동체 속에서 아시타카는 이미 죽은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로 보이는 샤먼은 덧붙입니다. ‘규칙에 따라 배웅은 하지 않겠다’. 야마토 민족과 오랜 싸움을 이어온 이들 가운데는 마을을 떠났던 이들도 많을 것이고, 개중에는 야마토 민족에 동화되어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돌아오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을은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규칙이 생겼을 테고요. 부족장이 되어 부족을 이끌었어야 했을 아시타카는, 이렇게 자신의 마을에서 ’사회적으로 사망’한 채 본인의 저주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찾아 떠나게 됩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산’이 원체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기 때문에 많이들 간과하게 되는 사실이지만, ’아시타카’도 ’산’만큼이나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습니다. ’붉은 사슴을 탄 채 변방에서 나타난 부족장’ - 신화적 인물에 걸맞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타카는 ’야쿠르’라는 이름의 붉은 사슴을 타고 다닙니다. 설정상 야쿠르는 평범한 사슴이 아니라, ’사자’라고 불리는 상상의 동물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를 나름대로 실재하는 동물처럼 재해석한 것이지요. ’야쿠르’도 아시타카가 신화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누 민족에게는 ’유카르’라고 불리는 독특한 운문 서사시의 양식이 존재했습니다. 유카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아이누 유카르’와 ’카무이 유카르’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이누 유카르’는 인간 영웅의 이야기를 다루는 일종의 영웅 서사시이며, ’카무이 유카르’는 동물의 1인칭 시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통해 특정한 교훈을 이야기하는 서사시입니다. 그리고 <모노노케 히메>는 이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노노케 히메>의 제목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시타카의 구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귀에서 귀로 전해진 이야기 유카라가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전해진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하야오가 ’유카라’를 염두에 두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재밌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화자가 바로 ’야쿠르’라는 것입니다.
아시타카는 샤먼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또 자연스럽게 묘사되기 때문에 깜빡하고 넘어가기 마련이지만, 아시타카는 신화적인 인물에 걸맞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시타카는 동물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자연이 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전할 수 있는 인물’이 샤먼이 아니라면 누가 또 샤먼이겠습니까? 게다가 본래 아시타카가 마을의 부족장이 될 사내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시타카의 부족은 샤먼이 이끕니다.
아시타카가 <모노노케 히메>의 모든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도 대단히 제의적이죠. 아시타카의 행적은 고대의 샤먼과 닮은 데가 많습니다.
산은 인간에게서 버려진 채, 들개에게 거두어져 자랐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를 하지 못합니다. 산이 인간과 직접 소통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시타카는 산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입니다.
야쿠르 이야기로 돌아가봅시다. <모노노케 히메>의 이야기 속 아시타카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면서 지켜본 존재가 누구일까요? 바로 야쿠르입니다. 야쿠르는 작중 후반부에서 뒷다리를 다쳐 마을 사람들에게 맡겨질 때까지 아시타카와 늘 함께 합니다.
야쿠르가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야쿠르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아시타카가 다쳐 쓰러져 있는 동안, 산은 야쿠르에게 아시타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이야기합니다. 야쿠르는 사실 (동물의 말이긴 하지만) 말을 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모노노케 히메> 즉 <아시타카 구전>의 이야기를 전한 존재가 어쩌면 야쿠르일지도 모른다고요. 애초에 모노노케 히메가 모방하고 있는 구비서사시 ‘유카르’ 양식은 동물의 관점에서 본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모노노케 히메>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입체적인 인물, ’에보시’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다시 일본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노노케 히메>가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신가요?
정답은 무로마치 시대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고려시대 즈음으로, 전국 각지에서 영주들이 일어나 분열해버리는 전국시대가 개막하기 직전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무로마치 시대의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하극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덴노의 권력은 약해졌고, 끊임없이 전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농업과 공업의 기술 발전으로 유통이 활발해지고 시장이 발달하기도 했습니다. 아시타카가 시장에서 쌀을 사는 장면에서 이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밌는 것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축소된 것이 전국시대이기 때문에, 무로마치 시대에는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했을 것이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역사적 상상력이 가미된 장면입니다. 재밌게도,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시타카의 금을 노리고 아시타카의 뒤를 쫓는 강도들 중에도 여성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모노노케 히메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존재인 ’지코 스님’이 죽을 끓이면서 된장을 푸는 장면이 나오는데, 된장이 전국적으로 보급된 것이 이 시기라는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디테일을 옅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에보시’는 무로마치 시대의 화신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시장의 여성들처럼,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상력이 가미되긴 했지만요. 무로마치 시대에는 ’바사라’라고 불린 의상이 유행을 했습니다. 형기를 마친 죄수들이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특이한 봉을 들고 다니던 데에서 비롯된 의상 스타일로, 마음대로 화려하게 입는 스타일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네요.
막부를 섬기지 않는 무사들이나 도적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에보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보시가 곧 바사라다.” 이는 중앙 정부가 지방을 단속할 힘을 잃어버린 현실을 반영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대로, 에보시는 곧 바사라입니다. 에보시는 여성이지만 중앙 정부가 힘을 잃고 사회가 어지러워졌기 때문에 본인만의 ’세’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자신만의 나라(마을)를 만들 수 있기도 했죠. 에보시가 통치하는 타타라 마을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이상향입니다.
타타라 제철소 마을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며, 모두가 함께 노동을 하고, 모두가 함께 생산수단을 공유합니다. 그야말로 공산주의적 이상향을 그리고 있는 듯합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는 추방되거나 버려지는 나병 환자들마저도 타타라 마을에서는 함께 노동하고, 간호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는 에보시가 단순히 ’마음이 따뜻한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에보시는 냉철한 사상과 정신을 갖추고 있는 ’혁명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에보시가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에보시는 문무를 겸비한 지식인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에보시가 이렇게 ’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에보시의 기반은 몹시 취약합니다. 에보시는 자신만의 이상향을 건설하기로 한 인물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했습니다. 중앙 정부나 영주의 관할에서 벗어난 땅이. 그래서 에보시는 ’시시가미의 숲’을 개척하게 됩니다.
시시가미의 숲은 ‘신성한 땅’인 동시에 자연의 힘이 여전히 살아있는 곳이기 때문에 덴노(중앙 정부)나 지역 영주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보시에게는 ’타타라 제철’ 기술과 명나라에서 들여온 ’이시비야’라는 화포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에 자연에 맞설 수 있었죠.
그래서 에보시는 특정 세력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모노노케 히메>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지코는 ’사장련’이라 불리는 수수께끼의 조직을 이끌고 있습니다. <별책 COMICBOX/Vol. 2>에 실린 <「모노노케 히메」를 읽고 이해하기>에서는 이 사장련의 정체를 ’가라카누치’로 추측하기도 하는데 ’가라카누치’는 곧 한반도에서 제철, 대장장이 기술을 가지고 일본으로 넘어와, 한반도와 일본을 오가며 기술을 전래하던 기술 집단을 의미합니다.
’사장련’의 정체가 무엇이든간에 분명한 것은 이들이 ’덴노’의 통제를 받는 일종의 특수부대라는 것입니다. (지코는 덴노의 칙서를 들고 에보시를 찾아옵니다.) 여기서 ’에보시’의 배후 세력이 드러납니다. 기반이 취약한 에보시가 손을 잡고 있는 세력은 바로 덴노, 즉 야마토 조정 = 중앙 정부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혁명가인 에보시도 덴노 세력과 손을 잡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에보시는 주변 영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있는 데다, 본인의 기반은 취약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덴노와 결탁하여 자신의 세력을 인정 받는 대신,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덴노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데, 덴노의 입장에서도 지방을 단속할 힘과 권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덴노는 타타라 제철소와 손을 잡고 지방을 단속할 힘, 즉 무기(이시비야)를 양산하기로 계약했을 것입니다.
이는 악순환을 낳습니다. 더 많은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철소의 규모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더 많은 숲을 개척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은 파괴됩니다. 인간적인 세계를 만드려는 ’혁명심’은 ’자연의 파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지코는 이런 덴노 세력을 대변하는 존재로, 덴노의 스파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매력 없는 남자이지만 사실 ’특출난 데가 없어 보이며 속을 알 수 없는 것’이야말로 스파이의 기본적인 자질이라고 보았을 때 지코는 아주 훌륭한 스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진나라가 사슴을 놓치자 천하가 사슴을 쫓았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사슴은 권력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시시가미가 사슴의 형상을 한 이유를 하나로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시시가미가 ’자연의 권력’을 뜻한다는 측면에서 사슴의 형상을 한 이유도 납득이 됩니다.
우리가 자연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이유는 생사의 주관, 삶과 죽음이 자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에 늘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자연의 권력’이 발생합니다.
시시가미가 밤이 되면 ’다이다라봇치’가 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이 아직 밤을 정복하지 못하던 시절, 밤은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연의 공포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이었지요. 그래서 시시가미는 밤이 되면 ’다이다라봇치’라는 밤의 거인이 됩니다.
일본의 비교종교학과 교수인 ’나카자와 신이치’는 「카이예 소바주」라는 시리즈를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자연으로부터 ’권력’을 가져와 ’계급 사회’를 형성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곰에서 왕으로」에 따르면 인간의 권력은 자연으로부터 가져온 것입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었던 자연을 통제할 수 있게 될 때, 자연의 권력은 인간의 권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중국만 보더라도 우왕은 물을 다스리는 ’치수 사업’을 통해서 권력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덴노는 도대체 왜 지코를 통해 에보시에게 ’시시가미의 목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사실 1번 - 불로불사를 얻는다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보다 2번 - 이시비야의 위력을 검증한다는 이유가 더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둘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불로불사는 (진시황 때부터 반복된) 절대권력의 지향점입니다. 그리고 이런 절대권력을 위해서는 ’무기’가 필수적입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옵니다.
무로마치 시대가 하극상의 시대로 여겨지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모노노케 히메> 시대의 덴노는 권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지방을 더 이상 단속할 수 없게 되었고 지방의 영주들이 난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덴노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합니다.
덴노가 에보시에게 ’시시가미의 목을 가져오라’고 지시한 명분을 지코는 ’불로불사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사실 이보다는 이시비야가 정말로 신을 죽일만한 무기인지 증명하라는 데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즉, <모노노케 히메> 속 ’신 죽이기’는 덴노가 권력을 되찾기 위한 무기의 시험 사업입니다.
결국 영화 속 모든 사건은 권력을 잃어가는 덴노의 발버둥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덴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의 양산을 지시했고, 그 과정에서 에보시와 손을 잡게 됩니다. 에보시는 무기를 양산하기 위해 숲을 개척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재앙신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타난 재앙신의 원한은 권력자들이 있는 도시가 아니라 변방의 소수민족, 변두리의 농민들을 향합니다. 아시타카가 지코 스님과 함께 죽을 나눠먹던 장소는 ’한때 마을이었던 곳’입니다. (인간) 도적들과 (자연) 재앙신이 휩쓸고 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지요.
영화 속 인간과 자연의 이항대립은 결국 ’권력’의 문제로 발생하게 된 갈등인 셈입니다. ’산’은 이항대립이 낳은 가장 이형적이면서도 변두리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니며, 자연에 속하고자 하지만 자연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모로는 산이 이런 이방인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인지, 산을 ’전적으로 자연의 존재’로 키우지 않았습니다. 모로는 산을 ’동물’로 키우지 않았습니다. 산은 옷을 입고 가면을 쓰고 다니며 장신구들로 몸을 치장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던 시대인 ’조몬 시대’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모로는 언젠가 산이 인간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모로가 아시타카를 만났을 때, 아시타카에게 일갈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시타카를 ‘떠보는’ 듯한 뉘앙스를 보입니다.
“아시타카여,” 산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모로가 아시타카에게 부탁합니다. “산을 구할 수 있겠는가?” 이 대사는 단순히 모로가 아시타카에게 산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아시타카를 믿고, 산을 맡기겠다고 선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모로의 증오심을 생각하면 더더욱이요.
이제 이야기는 클라이막스로 접어듭니다.
사람들 중에는 <모노노케 히메>에서 아시타카의 역할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시타카가 어딜 보아서 ’중재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입니다.
아시타카는 단순히 동물의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해당 공동체를 구한 ’영웅’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해온 모든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다시 한 번 복습해봅시다.
에보시 - 에보시의 목적은 자신의 이상향인 ’타타라 마을’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기반을 마련하고자 덴노와 손을 잡고 시시가미의 목을 가져오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는 주변의 지방 영주들과 사무라이, 그리고 도적들이 타타라 마을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지코 스님 - 지코 스님은 덴노와 중앙 정부를 대변합니다. 권력과 지방에 대한 단속, 통제권을 잃어가고 있는 중앙 정부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타라 마을에서 철과 무기 「이시비야」를 양산하여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며 그 위력을 증명하기 위해 ‘신을 죽여야’ 합니다.
모로 일족과 산 - 에보시는 철과 무기를 양산하고 숲의 힘을 약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숲을 파괴하고 있으며, 나아가 시시가미의 목을 덴노에게 바치려 하고 있습니다. ’시시가미’를 수호해야 하는 모로 일족과 산은 에보시와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보시가 ‘신 죽이기’를 위해 숲으로 떠나는 사이, 주변의 영주가 타타라 마을에 공격을 해오면서 이들의 이해관계는 또다른 일면을 드러냅니다. 사실 덴노에게 에보시는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서 ’쓰고 버리는 말’에 불과한 셈입니다.
그래서 타타라 마을이 사무라이들에게 공격을 당해 위험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에보시에게 알리려 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타타라 마을’의 안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보시는 덴노의 명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 어차피 타타라 마을이 위험에 빠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타타라 마을에 위험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시시가미를 죽이는데 앞장섭니다.
결국 서로의 이해관계 속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총체적 난국에 빠져버린 파국 속에서 이 상황 속에서 아시타카는 차근차근 타협점을 찾아나갑니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에게는 에보시를 다시 데려오겠노라고 약속하고, 에보시에게는 ’진정한 적을 보라’고 다그칩니다. (통하지는 않지만)
모로에게는 산을 구하겠노라고 약속하고 재앙신의 촉수에 파묻힌 채 저주에 걸려가던 산을 구하는데 성공합니다. 최악의 파국 속에서 차근차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수행해나갑니다. 그리고 결국 에보시가 신을 죽이면서 종말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지코(덴노) 세력에게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의 두 세계를 본인이 화해하겠노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세계를 종말로 몰아넣고 있는 다이다라봇치에게 시시가미의 목을 헌정함으로써 샤먼으로서의 임무를 완성합니다. 두 세계를 중재하는 역할입니다.
드디어 마지막 결론점에 이르고 있습니다. <모노노케 히메>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까지 따라오신 분들이라면 <모노노케 히메>가 단순히 인간과 자연의 이항대립을 다루는 작품이 아니라는데 동의하실 겁니다.
결국 아시타카의 중재로 인해 ‘자연의 권력을 얻어 신이 되려는’ 덴노의 계획은 저지되었고, 역사는 우리가 아는대로 ’전국시대’를 향하게 됩니다. 덴노는 완전히 실권을 잃은 채 교토에 갇힌 꼭두각시가 되고, 영주들이 난립하면서 난세가 시작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로마치 막부 시대, 제철소 마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일본의 역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아시타카의 중재로 인해 실패했지만, 같은 역사가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메이지유신으로 대변되는 ’근대화’를 통해 일본은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기술과 무기를 받아들입니다. <모노노케 히메> 시대의 타타라 제철 기술은 서구의 용광로 제철 기술로, 「이시비야」 화포는 군함이 되어서 동일한 역사를 반복하게 됩니다.
‘근대화’의 시기 일본과 <모노노케 히메> 속 일본의 차이가 있다면, <모노노케 히메> 속 덴노는 결국 신이 되는데 실패하고 말지만 ’근대화’ 시기의 일본은 인간인 동시에 신이 되는데 성공해버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이자 신’이 된 덴노를 얻은 일본은 ’근대화’를 감행하면서 훗카이도 지방을 포함한 일본 열도 곳곳을 ’개척’했으며 군함과 무기로 중무장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덴노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신토’라고 불리는 국가 종교를 새롭게 정비하였습니다. 이렇게 일본이라는 나라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태어난 일본은 밖으로는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고 안으로는 아이누를 포함한 소수민족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아이누족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일본에는 소수민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옵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준비된 총구는 결국 밖으로 향하게 됩니다. 일본은 그렇게 제국주의 국가로 재탄생을 했습니다. 제국이 되고자 하는 일본의 욕망은 더욱 커져갔고, 침략은 노골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근대화’의 끝에 있었던 것은 폐허였습니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권력’에서 비롯됩니다. <모노노케 히메>가 자연 파괴에 대한 경고를 담은 생태주의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은 맞지만,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이유는 결국 ’권력을 얻기 위한 데’ 있습니다. 현재 자연의 파괴를 가속하고 있는 것은 기업을 위시한 자본주의의 탐욕에 있듯이요.
결국 우리가 권력을 향한 욕망을 놓지 못한 채 ’권력’만을 갈망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황무지와 폐허가 된 세계를 목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눈앞에 닥친 기후위기 속에서도 바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이지만, 이런 현실을 중재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섣불리 그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가장 절망스러운 현실에 처한 인물의 입을 빌어 “살아있는 한 어떻게든 된다”는 힘 있는 대사로 대신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대사가 힘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어떤 전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늘 등장하는 테마이기도 한 이 ’어떤 전제’는 바로 약자들의 연대입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덴노의 탐욕을 저지한 것은 아시타카 개인만의 힘이 아니라 결국 소수민족, 난민, 나병 환자, 여성과 같은 약자들이 연대한 결과였습니다.
얼마 전, 미야자키 하야오는 ’방사능을 머금은 바람이 다시 불어오고 있다’고 비관적으로 말했습니다. 약자들의 연대를 통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데 성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 골방 늙은이의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현실 속 사람들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