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결말을 두고, 코하쿠는 죽었을 거라느니 치히로는 기억을 잃었을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오해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유바바는 타인의 이름, 즉 정체성을 빼앗아 군림하는 마녀입니다. 유바바의 밑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이름을 바쳐야만 합니다. 치히로는 유바바의 밑에서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실수인지 의도인지 이름을 잘못 쓰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이름을 되찾게 되긴 하지만요.
이름을 잊는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그리고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린다는 것.
치히로는 다행히도 앞서 말했듯이 ’친구들의 편지’라는 매개체와 하쿠의 도움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되찾습니다. 유바바의 밑에서 일하지만, 정체성을 잊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합니다. 하지만 하쿠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유바바에게 종속되어 있습니다. 마법을 얻기 위해 정체성을 상실해 저주에 걸린 남자의 테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되풀이되지요.
하쿠는 천성이 선한 신이기 때문에 (유바바의 명령 때문에 행동할 때가 아닐 때에 한해서) 치히로를 도와주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사실 코하쿠가 유바바의 밑에서 마법을 배우게 된 계기도 이런 선한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가면서까지 사람을 구해주기도 하는 존재였으니까요.
그래서 하쿠는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치히로를 구해주기 위해서 목숨을 건 도박을 합니다. 아니, 이건 도박이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도박은 이길 가능성이 있을 때에나 하는 것이니까요. 하쿠는 치히로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집니다.’ 명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하쿠의 천성이 그만큼 선하기 때문이라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쿠는 아직 정체성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유바바가 죽으라면 죽어야’ 합니다. 하쿠는 치히로에게 최후의 기회를 주는 대신 자신이 죽겠다는 과감한 선택을 내린 겁니다. 솔직히 납득이 잘 되지 않지요?
사실 이 ’납득이 되지 않는 희생’이라는 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이기 때문입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사실, 미야자와 겐지의 소설 <은하철도의 밤>을 오마주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기차라는 소재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 일본의 국민 소설이기도 한 <은하철도의 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집을 비운 아버지를 대신해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조반니’의 유일한 친구는 ’캄파넬라’입니다. 다른 친구들, 특히 ’자넬리’는 조반니를 애비 없는 자식이라며 놀리며 따돌립니다. 어느 날 쓸쓸하게 하늘을 보던 조반니는 갑자기 찾아온 은하철도를 타고 유일한 친구인 ’캄파넬라’와 함께 우주를 여행하게 됩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희생의 의미’를 배워나갑니다. 은하철도라는 꿈(인 동시에 사후세계)에서 깨어난 조반니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바로 자신의 유일한 친구 캄파넬라가 자신을 따돌리는데 앞장 섰던 자넬리를 구하려다가 실종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축제 도중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넬리를 구해주곤 캄파넬라 자신은 익사해버린 것입니다. 조반니는 충격을 받지만, 캄파넬라의 아버지는 별로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담담하기만 합니다. 캄파넬라의 아버지는 조반니의 아버지가 곧 돌아올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며 지금쯤 아버지가 왔을지도 모르니 집에 가보라고 얘기합니다. 조반니는 집으로 돌아가며 캄파넬라는 죽지 않았고 은하철도를 타고 떠난 것이라 생각하며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은하철도의 밤>은 워낙에 모호해 뚜렷한 주제의식을 찾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작품 전반에 흐르는 ’성장’과 ’희생’의 메세지 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미야자키 하야오판 <은하철도의 밤>인 셈이죠. 이 미야자키 하야오 버전의 <은하철도의 밤>에서 하쿠가 바로 ’캄파넬라’입니다. 타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친 고귀한 희생자입니다. 치히로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서 도와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지요.
유바바에게 치히로가 다시 인간들의 세계로 돌아갈 기회를 달라고 얘기하는 바로 이 장면은 하쿠의 희생적인 속성이 극단에 달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쿠는 이미 치히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습니다! 여전히 유바바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유바바가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사실을 모르는 치히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하쿠를 타고 다시 유바바가 있는 온천으로 돌아갑니다. 치히로를 내려주고 나면, 하쿠는 이제 꼼짝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거지요.
그런데 ’기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쿠의 희생적인 속성 때문에 몇 번이나 목숨을 건졌던 치히로가 사실은 하쿠와 인연이 있었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치히로는 어렸을 적에 강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본래 자연의 섭리에 따르면 치히로는 거기서 죽었어야 했죠. 하지만, 하쿠는 무한정의 희생을, 도움을 베푸는 존재입니다. 고귀한 희생의 화신이죠.
하쿠는 자신 안에 빠졌던 치히로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구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하쿠의 등에 올라탄 치히로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마침내 이 기억은 하쿠에게도 이어집니다.
“코하쿠 강, 네 이름은 코하쿠야.”
그 순간 이름을 되찾은 하쿠는 용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는데요,
하쿠는 치히로를 내려주는 순간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하쿠는 잔뜩 긴장해 있었을 겁니다. 치히로를 데려다주는 동안 단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순간, 하쿠는, 아니 코하쿠는 긴장이 풀린 사람처럼 몸에 힘이 풀려버리죠.
왜냐하면 이제 이름을 되찾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유바바에게 종속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주가 풀린 것이죠. 그래서 하쿠는 이제 유바바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장면이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지금껏 희생을 베풀어오기만 했던 하쿠가 자신의 희생으로 인한 ’보답’을 받는 순간이기 때문이지요. 치히로를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해왔던 하쿠는 그 희생의 보답으로 자신의 정체성(=이름)을 되찾고, 나아가 유바바에게 죽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하쿠의 희생이 치히로를 거쳐 하쿠 자신에게 돌아온 기적적인 순간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에 삽입된 OST의 제목은 Reprise(반복, 재현)인데, 음악적인 구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런 기적의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제목이기도 한 셈입니다.
그럼 인간 세계로 돌아간 치히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그 답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언급했습니다. 이승으로 돌아온 치히로는 기억을 잃었다고요. 하지만 ’망각’과 ’기억’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터널을 나와 기억을 잃은 것에 대해 아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그리고 사실 창작자의 견해는 작품을 독해하는데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기도 합니다. 작품을 독해하는 건 결국 수용자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왜 애써 성장한 치히로가 이 모든 경험을 하고 성장시킨 뒤 기억을 잃는다는 설정을 넣은 걸까요? 그건 사실 이 애니메이션이 ’성장’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맞지만, 서구식의 성장을 얘기하는 작품이 아니거든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저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불신과 의존은 물론 공존하지만, 의존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의 세계를 이해했다 할 수 없습니다. 아이의 성장과 자립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은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수업을 거쳐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선을 긋는 독일 교양소설과는 다르지요. 아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현명해지는 만큼 또 몇 번이고 바보 같은 짓을 합니다. 아이에게는 거듭 바보 같은 짓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세계는 특히 그렇습니다.
<책으로 가는 문>, 미야자키 하야오
치히로가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의 실체(=돼지나 다름 없는 어른)을 본 뒤에도 치히로는 부모님을 불신하는 동시에 의지해야만 하는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부모에게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어린아이로서 신들의 세계에서 겪은 경험들은 부모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사건에 불과하겠죠. 아무리 부모가 미덥지 못해도 치히로에게는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니까요. 아니 사실 이 작품 자체가 부모의 보호를 되찾기 위한 어린이의 투쟁이라 볼 수도 있어요. 게다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치히로가 성장했다는 것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치히로는 신들의 세계에서 여러 경험을 하며 ’체득’했기 때문에 마지막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거지 치히로가 정신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럼 치히로의 모든 여행은 의미가 없었던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치히로는 이미 ’부적’을 받았잖아요. ’망각과 기억’의 모티브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치히로가 잊어버렸던 자신의 이름을 되찾게 된 계기는 (관객들이 얼굴도 모르는) 친구들의 작별 편지 덕분이었습니다. 제니바는 머리끈을 선물하며 강조합니다. “부적이다. 친구들과 함께 엮은 실로 짰으니까.”
치히로가 친구들의 선물을 통해 망각을 벗어나 이름을 기억해내고, 하쿠의 등에 올라타서 망각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기억해내고, 하쿠가 치히로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냈던 것처럼, 언젠가 치히로가 어른이 되어 부모님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을 때 즈음, 혹은 신들의 온천에서의 경험에서 체득했던 경험들이 필요해질 즈음, 혹은 그곳에서 사귄 수많은 신들과의 인연이 떠오를 즈음 머리끈 부적은 조용히 치히로에게 망각했던 경험을 되돌려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니바가 말했듯,
“한 번 만난 건 잊지 못하는 거니까”
하지만 적어도 다시 한 번 인간들의 세계에서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치히로에게, 신들의 세계에서의 경험은, ‘아직은’ 필요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치히로는 기억을 잃었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떠오르겠지요. 센이 치히로를 기억해낸 것처럼, 치히로가 하쿠의 이름을 기억해낸 것처럼 말이에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제곡, <언제나 몇번이라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