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위의 포뇨>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중 최종보스라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귀여운 외형과는 달리 가장 난해하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든 말든 미야자키 하야오가 난생 처음 직접 작사까지 맡은 <벼랑 위의 포뇨> 주제가는 이 애니메이션이 아동용이라는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합니다.
사실 뒤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지만 <벼랑 위의 포뇨>는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진정한 아동 애니메이션’을 추구하고자 했던 애니메이션입니다.
은퇴를 철회한 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부터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쉬지 않고 작업을 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를 느꼈고 - 그래서 <벼랑 위의 포뇨>는 CG 없이 수작업으로만 제작되었습니다. - 그 결과 어린이가 아닌 어른들에게는 난해하게 느껴지는 작품이 된 게 아닐까 합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벼랑 위의 포뇨> 사이에는 미야자키 고로의 작품 <게드 전기>가 있었는데요,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들이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는 걸 반대했지만, 스즈키 토시오를 포함한 지브리의 임원들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간섭을 이겨낼 수 있는 인물’이라며 추천하여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의 드림 프로젝트(였지만 판권 계약까지 걸린 시간이 너무 길어 열정을 잃고 표류하고 있던 기획) <게드전기(어스시의 마법사)> 애니화를 이루게 됩니다.
미야자키 고로가 <게드전기>의 감독으로 발탁된 데에는 단순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이라는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브리 박물관을 만들 때 건축업자들이 학을 떼고 도망가게 만들었는데 미야자키 고로가 끝까지 남아 지브리 박물관을 완성한 공이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게드 전기>의 제작 초반만 하더라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가 행여 잘못될까 작품에 사사건건 개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미야자키 고로가 ’난 당신 같은 아버지에게 자란 적이 없다’는 팩스를 받고 충격을 받아 미야자키 고로에 대한 간섭을 멈추게 되는 ’팩스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를 계기로 부자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미야자키 고로에 대한 간섭을 그만두게 됩니다.
<게드전기>가 완성된 후,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들의 작품을 보러 시사회장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등장인물인 아렌이 ’나는 아버지를 죽였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사회장을 뛰쳐나가 줄담배를 피웠죠.
이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기자들이 미야자키 하야오를 찾아가 시사회장을 뛰쳐나온 이유를 질문하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녀석, 어른이 못 됐어.”라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벼랑 위의 포뇨>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미야자키 고로의 부자 관계에 대한 은유가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며, 작품에서 분명히 그 은유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작품을 보는 건 작품을 너무 개인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영화에 직설적으로 담아냈다고 해서 “어른이 못 됐다”고 말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인데, 본인이 그런 실수를 반복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 사건이 미야자키 하야오로 하여금 자신이 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지에 대해 성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때문입니다. <벼랑 위의 포뇨>에는 하야오가 자신의 원점을 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흔적이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더 확신하게 됩니다.
이 일화를 통해 우리들의 목적지가 정해졌습니다. 바로 원점입니다.
여러분들은 포뇨의 이름을 알고 있으신가요? ‘포뇨’라는 이름은 소스케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포뇨가 소스케에게 포뇨라는 이름을 받기 전, 포뇨의 이름은 ’브륀힐데’라고 언급되는데 브륀힐데는 독일의 음악가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발키리의 이름입니다. ’브륀힐트’ 혹은 ’브륀힐다’라 불리는 발키리를 모티브로 해서 재창작한 캐릭터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포뇨에게 왜 이런 이름을 부여한 걸까요?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하는 바그네리안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짚고 넘어갔습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니벨룽의 반지> 영향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벼랑 위의 포뇨>에서는 더욱 노골적입니다. 특히 음악에서 두드러지죠.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랜 바그너의 추종자(바그네리안)으로,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바그너 오페라와 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시도한 적도 있는 인물입니다. <벼랑 위의 포뇨>가 그런 시도(본인의 애니메이션을 바그너의 오페라처럼 만들고자 하는 시도)를 가장 극단까지 밀어붙인 작품이라는 흔적은 <벼랑 위의 포뇨> 작품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위의 포뇨의 이름도 그렇고, 포뇨의 테마곡도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포뇨의 비행>과 <발키리의 비행>을 비교해서 들어봅시다. 그럼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될 겁니다.
Richard Wagner - Ride of The Valkyries
어린이 문학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사랑은 대중에 알려진 것보다 더 대단합니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의 엘리트 대학교인 가쿠슈인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습니다. 가쿠슈인 대학교는 전통적으로 천황가의 사람들이 다니는 것으로 알려진 귀족 학교입니다.
가쿠슈인 대학에는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학과와 동아리가 없었기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가장 비슷한 곳인 ‘어린이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다 합니다. 평소에도 철학 책을 읽으면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얘기하는 것이 싫어 책을 잃지 않던 미야자키 하야오였기 때문에, 삶에 대해 예찬하는 어린이 문학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미에 잘 맞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가라사대 ’살아라’라고 얘기하는 문학은 어린이 문학 뿐이었다고 하니까요.
미야자키 하야오가 ’대선배’라고 밝힌 두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논짱, 구름에 타다>라는 작품을 쓴 ’이시이 모모코’와 <싫어싫어 유치원>을 쓴 ’나카가와 리에코’입니다. 이 두 인물과 그 대표작들은 각각 서로 다른 방향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나아가 <벼랑 위의 포뇨>에 영향을 미칩니다.
어린이문학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뭔가 좋은 것을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말 잘 들으면 좋겠다, 배우면 좋겠다, 나쁜 짓 하면 혼난다는 등 교훈을 담으려 합니다. 그러다 점점 문학적 감동을 담은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려는 움직임으로 나아가지요. 어린이의 마음은 순수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노력도 시작되었습니다. <싫어싫어 유치원>은 이 모든 것은 뛰어넘어 “이것이 아이들입니다.”하고 보여주었습니다.
- 미야자키 하야오
<논짱, 구름에 타다>와 <싫어싫어 유치원>이 두 편의 동화는 난해하기 그지 없는 <벼랑 위의 포뇨>를 독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작품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하고자 했던 감성은,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동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늘 관찰의 중요성을 얘기해왔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선 집념에 가까운 관찰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벼랑 위의 포뇨>는 실제 아이들이 할법한 행동을 그대로 보여줘 행동과 대사만으로도 놀랍게 만듭니다. 관찰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집착은 제가 굳이 글로 길게 풀어서 쓸 이유가 없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예술가로서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벼랑 위의 포뇨>는 이상한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는 번역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이상한 점’들이 순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요. 지금부터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서 그 묘한 ’이상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짚어볼게요.
주인공입니다. 소스케의 이상한 점은 어린이집 교사를 제외한 모든 인물을 이름으로 부른다는 겁니다. 심지어 - 정발판에서는 순화되었지만 - 어머니를 이름인 ’리사’라 부르고, 할머니들도 꼬박꼬박 이름으로 부릅니다. 이 때문에 일본의 관객들은 더 큰 위화감을 느껴야 했지요.
가장 두드러지는 장면은 아버지가 육지에 상륙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어머니가 토라져 있자 “리사, 울어?”라 말하며 위로하는 장면입니다. 5살짜리 어린이가 어른을 이름으로 부르며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벼랑 위의 포뇨>가 그리는 세계는 어딘가 이상합니다.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엄청난 존중심을 가지고 있거든요. 인면어를 데려와 금붕어라 말하며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하는데 일절 토를 달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이 하는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지 않고 진심을 다해 함께 대화를 나눠주죠.
포뇨가 해일에 밀려가자 소스케가 홀린듯 바다에 뛰어듭니다. 그걸 발견한 리사는 소스케를 바다에서 구해오는데 보통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소스케에게 ‘정신이 있니 없니’ 야단을 쳐야 마땅했을 겁니다. 그런데 리사는 아이스크림을 사주고는 소스케의 관점을 깊이 이해해주는 모습을 보입니다.
일련의 묘사들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논짱, 구름을 타다>를 읽으며 느낀 것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논짱, 구름을 타다>를 극찬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논짱, 구름을 타다를 읽어보면 ’민주주의’라는 말은 전혀 쓰여 있지 않지만, 논짱의 집이 아주 민주적인 가정입니다. 무척 온화하고, 소중한 것이 모두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논짱이 병약한 아이여서인지도 모르지만, 그것뿐이라면 당시 얼마든지 있었던 일입니다. 저도 병약했으니까요. 중요한 점은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느낌입니다.”
- 미야자키 하야오
여기서 <벼랑 위의 포뇨>의 실마리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계의 모습이 담긴 작품인 것입니다. 소스케의 집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있습니다. 어린이집과 양로원이 붙어 있어 어린이와 노인들은 함께 교류하며 각자의 세계를 공유합니다. 이 ’바다가 보이는 마을’의 세계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이상향을 간직한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노인도, ’인간으로서 존재’하며 존중을 받는 세계입니다.
<벼랑 위의 포뇨>는 표면적으로 보면 포뇨와 소스케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벼랑 위의 포뇨>는 리사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실은 영화의 시작부터 우리를 반기는 것이 <어머니의 노래>인 것에서 분명해집니다. <벼랑 위의 포뇨>에서 어머니는 여성이며, 바다이고, 생명입니다.
후지모토는 <벼랑 위의 포뇨>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입니다. 인간임에도 인간이 싫어 바다로 들어가 살게 되었고, 태고적 바다와 생명의 여신인 그랑 맘마레 - 위대한 어머니 - 와 결혼했습니다.
바다에 있을 때는 공기방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지만 육지에 나와서는 물을 뿌리며 다녀야 하는 장면에서 ’육지에도 바다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지모토는 입체적인 인물인데요, ’생명의 물’을 모아 생명의 대폭발을 일으키려 하지만 (이는 인간의 멸종을 뜻합니다.) 한편으로는 생명의 균형을 맞추는 자이기도 합니다.
포뇨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입니다. 바다는 생명이 태어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생명이 죽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포뇨는 삶과 죽음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포뇨의 본명은 ’브륀힐데’로 브륀힐데는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한 발키리입니다. 발키리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존재로 저승인 발할라에서 오딘의 시중을 들며 전사를 데려오는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발키리는 곧 저승사자입니다.
포스터만 봐도 포뇨가 ’태어나고자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다는 양수, 포뇨는 태아, 해파리는 양막이라는 것을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답지 않게 대단히 직관적인 은유거든요.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딱히 감출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포뇨의 욕망이 드러납니다. 포뇨는 아직 태어나지 못한, 하지만 태어나고 싶은 그런 존재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자기를 가두었다며 화를 내는 장면을 보면 포뇨가 ‘태어나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추측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곧 삶으로부터의 구속이요 감금인 셈입니다.
귀여운 포뇨는 잠시 뒤로 하고 가장 중요한 인물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바로 토키입니다. 토키는 어디서나 볼법한 대단히 완고하고 고집 센 할머니의 전형입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요, 하나는 관객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존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정상적으로 쓰나미를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인면어가 지상에 올라오면 쓰나미가 온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만 얘기하자면 토키는 과거에 쓰나미를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토키 할머니는 관객들의 대변자입니다. 교육과 경험 때문에 편견에 둘러싸인 관객들은 <벼랑 위의 포뇨>가 보여주는 세계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계에는 어른스러운 ’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함께 따라갈 수 있는 인물을 여기에 배치해둔 것입니다.
위의 어린이문학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지만 <벼랑 위의 포뇨>는 관객들에게 다른 방식으로의 감상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방식이란 어른의 눈높이가 아니라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인데 이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자세히 보면 많은 장면들이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포뇨가 다시 한 번 인간세계로 나가기 위해 쓰나미를 일으키는 장면에서 이러한 감상법이 강조됩니다. 포뇨의 동생들은 마법의 힘으로 쓰나미가 되어 포뇨를 배웅해주는데요, 어른(소스케의 아버지)의 관점에서는 물고기를 물고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해일과 파도로만 인식합니다.
하지만 편견이 없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어린이인 소스케는 해일을 보고 ’물고기’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인식할 수 있는 걸 마법이라고 한다면, 어린이들의 세계에는 마법이 실재합니다.
문제는 그렇다 보니까 <벼랑 위의 포뇨>를 보면서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일어났다가 포뇨가 바다 위를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라면을 먹다가 세상이 물에 잠기고… 그래서 오늘은 아예 장면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생명의 관리자인 후지모토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힘을 담은 생명의 물을 우물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생명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해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 세상을 맛보았던 포뇨는 다시 한 번 소스케를 만나기 위해 마법, 즉 생명 에너지를 이용해 양서류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포뇨도 마법사 후지모토의 자식이기 때문에 마법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갖출 수 있지만, 충분히 마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되고 싶어도 양서류 정도가 고작입니다.
문제는 포뇨가 지상으로 나가려다가 어마어마한 대형실수를 저지르면서 시작됩니다. 아버지 후지모토가 최소한 1800년대부터 모아온 생명의 물이 모인 우물의 문을 열어버린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엄청난 양의 생명 에너지가 쏟아져 포뇨도 엄청난 양의 마력을 얻게 되고, 마침내 완전한 인간의 형태를 갖출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이 생명 에너지가 포뇨에게만 전해진 게 아니라는 건데요. ‘바다’ 그 자체가 생명 에너지로 가득 차 태곳적 생명이 넘실대는 바다로 변화합니다.
이 때문에 생명의 균형은 무너지고 맙니다. 바다는 태고적으로 돌아갔고, 엄청난 에너지를 얻은 바다는 달을 끌어들여 세상의 멸망을 가속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달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하고, 강력해진 중력 때문에 인공위성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세계의 멸망이 시작된 겁니다.
하지만 포뇨는 세상의 멸망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겁니다. 포뇨는 넘쳐나는 생명 에너지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소스케를 만나러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포뇨는 강력해진 바다의 생명 에너지를 활용해 쓰나미를 일으켜 자신이 갔었던 곳으로 달려갑니다.
생명 에너지의 대폭발로 인해 세계는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고, 바다에 침몰하거나 실종된 배들이 무덤을 이루어 다시 나타나는가 하면 달이 바다를 끌어올려 부풀어 오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과거와 미래의 경계도 무너지고 말았단 겁니다.
포뇨가 몰고 온 것은 단순히 쓰나미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과거와 미래, 삶과 죽음, 탄생과 파괴의 경계를 무너뜨려 모든 것이 혼재된 뒤죽박죽의 세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제 이 세계는 진짜로 논리가 통하지 않는 부조리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인면어가 올라오면 쓰나미가 몰려온다’는 전설도 바로 이 때 만들어졌을 겁니다. 과거와 미래가 붕괴된 시점에 찾아온 쓰나미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동시다발적으로 쓰나미가 닥쳐왔을 테니까요. 여기서 ’인면어가 올라오면 쓰나미가 몰려온다’는 전설이 생겼을지도 모르죠.
해일이 마을을 뒤덮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포뇨와 소스케가 만납니다. 평온한 장면이지만 사실 이 장면은 인류의 운명이 걸린 장면이기도 합니다. 소스케가 포뇨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포뇨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상상만 해도 두렵습니다.
르뤼에는 다시 떠올랐고, 태곳적의 그레이트 올드원이 인간을 시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난생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해일을 뚫고 달려왔는데
아, 이 여자아이가 얼마 전에 만난 그 금붕어구나
하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소스케는 그 어려운 걸 해냅니다. 편견 없는 어린이의 시선이 세상을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나카가와 리에코가 만든 동화 <싫어싫어 유치원>을 돌아봐야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려서 <싫어싫어 유치원>을 읽은 스태프들에게 그 감상을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섬뜩했다든가 무서웠다든가, 모두 그 이야기에 빨려들어가 두근두근했던 강렬한 인상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 작품에는 어른스러운 ‘조리’ 같은 건 없습니다. 첫번째 이야기인 <고래잡이>에서 보육원 교실은 바다가 되어버리고,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바다인 채입니다. 책을 읽은 아이들은, 지금도 바다 그대로일까 두근두근하고 있겠지요. 아이들의 놀이 세계는 현실과 공상의 경계가 없습니다. 공간에도 시간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 공간과 시간에 얽매이고 원인과 결과에만 정신을 빼앗겨, 자아를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은 <싫어싫어 유치원>의 세계를 만나면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헤맵니다. 자아는 보통 부모나 형제, 친구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됩니다. <싫어싫어 유치원>은 그런 것이 없는 차원의 세계이므로, 자아를 내세우며 시시하다거나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 미야자키 하야오
인공위성이 떨어지고, 지구가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 지경까지 왔지만 <벼랑 위의 포뇨>가 이토록 평온한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이 무너진 세계는 사실 어린이들의 놀이 세계과 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포칼립스의 세계이겠지만, 어린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세계인 것이죠. 그래서 ’세계가 멸망하고 있다고!’라 외치는 후지모토의 외침이 의아할 정도로 평온하게 그려집니다.
포뇨 때문에 세계가 멸망의 위험에 처했다고 조급해하는 후지모토에게, 포뇨의 어머니 그랑맘마레가 제안합니다. “포뇨를 인간으로 만들면 되잖아요?”
그랑맘마레는 <모노노케 히메>에서 사슴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생명의 여신이지만, 죽음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서 많은 신적인 존재들은 이런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법이 실패하면 물거품이 되잖아.”라는 후지모토의 말에 “우린 모두 물거품에서 왔는걸요”라 대답하는 그랑맘마레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섬뜩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서 생명의 신은 생명을 제공하는 신인 동시에 생명을 거두는 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수면 위로 나온 그랑 맘마레의 머리카락과 수면 아래에 있을 때의 그랑 맘마레의 머리카락 표현의 차이에서 더 극명하게 표현됩니다. 수면 아래에서, 그랑 맘마레의 머리카락은 섬뜩한 해초처럼 보입니다.
넘치는 생명 에너지가 바다를 생명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데본기의 바다가 돌아왔어요. 이 장면에 나온 생물들은 대부분이 데본기에 살던 과거의 종입니다. 그렇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풍경입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고생물에 있어서는 척척박사니까요. 미야자키 하야오가 얼마나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등장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포뇨가 대형사고를 쳐서 지상으로 올라온 이후로 시간의 경계는 무너졌습니다. 이분법도 무너졌고요. 죽은 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시치미를 뚝 뗀 채 산 자와 공존하고 있습니다. - 죽은 자는 산 자의 이름과 행적을 알고 있습니다. -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세계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선 안됩니다. 애초에 이미 논리로 작품을 이해하려고 했다면 쓰나미가 오는 장면부터가 전혀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요. 여기서 포뇨는 아기 시절의 토키와, 그 토키를 보살피는 부모님들을 통해서 생명에 관해 배웁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영감님은 너무 친절해서, 다시 한 번 정밀한 배경 묘사를 통하여 ’시간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배경에 욱일기를 연상시키는 깃발이 있는데, 이 깃발은 위로 떠오르는 해를 의미하는 욱일기가 아니라 아래로 지는 해를 의미하는 ’낙일기(Falling Sun)’입니다. (욱일기와 낙일기의 결정적인 차이는 해를 온전하게 그렸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실수로라도 욱일기를 그릴 인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장면이 이어집니다. 포뇨는 아기가 울자 아기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어떤 마법을 걸어주는데 - 아기를 진정하게 만드는 마법이라 여겨집니다. - 이 장면에 담긴 비밀은 마지막에 가서 짚고 넘어가게 될 겁니다.
한편 해바라기 양로원의 노인들은 -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합시다. - 다들 사망하셨습니다. 할머니들은 대사를 통해 넌지시 본인들이 사망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미 알고 있으신 거죠. 그도 그럴 게 이 공간, 전형적인 천국의 이미지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게 엄청난 반전이라던가, 충격적인 비밀이라는 식으로 자극적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어차피 이 세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졌으니 별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의 해바라기 양로원은 사후세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자궁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어머니입니다.
<벼랑 위의 포뇨> 속 진정한 주인공인 리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할머니들을 구하려다가 덩달아 사후세계로 오게 된 것이겠지요. 리사는 그 정도로 대범한 인물입니다. 이제 세계의 운명은 리사와 소스케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소스케가 겪어야 할 시련이란 무엇일까요?
터널은 상당히 직설적인 은유입니다. 태어남의 통과의례이지요. 여기서는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태내회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소스케는 여기 지나간 적 있어라 말하는데, 소스케는 진작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포뇨는 여기 싫어라 말하는데, 태어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건 중의적인 이야기입니다. 작품 내적인 논리로 보면 소스케가 해바라기집에 가기 위해 지나가는 터널이고, 포뇨가 싫다고 말하는 것은 후지모토가 마력을 잃게 만드는 마법을 걸어두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터널은 태내회귀의 은유이자, 후지모토의 마법 중화가 걸린 중의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터널을 지나면서 포뇨에게 걸린 마법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소스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포뇨를 구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토키 할머니는 해바라기집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논리’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면 죽음을 뜻하는 것이 분명한 물에 잠긴 해바라기집에 따라갈 이유가 없을 테니, 토키 할머니가 남아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토키 할머니는 소스케를 구하려다가 포뇨를 얼굴에 맞게 됩니다.
이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한 번 만난 건 잊을 수 없는 거란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부터 이어졌던 망각과 기억의 모티브가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토키 할머니처럼 이분법, 논리, 어른스러운 ’조리’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사람도 한때는 공상과 논리 없는 세계의 주민인 어린이였습니다. 토키 할머니는 아기 시절에 쓰나미라는 충격적인 재난을 경험한 적이 있는 데다 ’인면어가 오면 쓰나미가 몰려온다’는 것과 같은 ’편견’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 인면어에게서 아름다운 마법을 선물 받았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직접 살을 맞부벼가면서요. ’편견’보다 강한 것은 ’경험’입니다. 설령 그것을 잊고 있었을 지라도요.
그래서 토키 할머니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변화합니다. 포뇨와 얼굴을 부볐던 기억이 떠오른 거겠지요. 소스케의 시련을 보면서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가장 이입하여 시련이 끝났을 때 가장 먼저 소스케에게 달려가 얼굴을 부비는 인물도 다름아닌 토키 할머니입니다.
앞서 말했던 최후의 시련이란 무엇일까요? <벼랑 위의 포뇨>를 이해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의 운명을 건 시련이라기엔, 너무나도 간단한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포뇨는 인간이 되고 싶어서 마법의 뚜껑을 열었어요. 인간이 되려면 포뇨의 진짜 모습을 알면서도 좋아해주는 남자아이가 있어야 해요. 당신은 포뇨가 물고기였단 걸 알고 있나요?”**
그랑맘마레가 질문합니다. 그런데 소스케는 포뇨를 보자마자 이전에 만났던 그 인면어가 바로 이 소녀라는 걸 알아본 전적이 있죠. 기출문제입니다. 쉽네요.
하지만 이 ’시련’은 단순히 앞으로도 좋아하겠다는 약속으로 끝나는 시련이 아닙니다. 그 왜, 지금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졌잖아요. 다시 말해서 소스케가 먼 미래에라도 포뇨에 대한 마음을 바꾸게 된다면 이 세계는 멸망해버리고 마는 지극히 공정한 시련인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시련을 이겨낼 자신이 있으신가요?
제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 소스케가 아니라 리사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리사가 소스케를 바람직한 사람으로 양육하느냐, 아니면 지극히 평범한 남성으로 키우느냐에 따라 세계의 존망이 결정되는 아름다운 시련인 것이죠. 자, 과연 리사의 자식 농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국이나 현실의 일본이었으면 세계는 곧장 멸망의 길에 들어섰겠지만 다행히도 이곳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이자, <논짱, 구름을 타다>의 영향을 받은 어린이 문학의 세계, 그리고 리사를 포함한, 어린이를 존중하는 어른들이라는 바람직한 양육자가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약속된 해피엔딩을 맞이합니다.
이 작품은 결국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세지이자 삶의 예찬입니다.
세상은 점점 살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과 한국은 압축 성장에 따른 부작용으로,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으니까요.
어린이문학의 기저에 깔린 정서는 ‘희망’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희망’. 다음 세대가 변화했으면 하는 ‘희망’. 이 세계가 점차 나아지기 위해서는 다음 세대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의 책임은 바로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살아있어서 기뻐’ 혹은 ’태어나서 기뻐’라 말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그런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어른들에게는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어린이집과 양로원이 붙어있는 세계. 여기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공존의 가능성을 질문합니다. 어린이와 노인, 삶과 죽음은 공존해야 합니다. 어린이문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요? 바로 다음 세대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어른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사실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서 진심을 다해 함께 대화해주고, 그 시선에서 세계를 인식하려 노력하는 것.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자아와 편견의 굴레에 갇혀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민폐라고 보는 태도, 노키즈존이라는 현실에 드러난 현상을 보세요.) 비록 만화 속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작품 속 세계의 태도를 본받아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의무가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