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신작 <아바타: 물의 길>을 이야기하면서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역작 <모노노케 히메>입니다. <모노노케 히메>는 아바타 시리즈에 큰 영향을 미친 영화로 여겨지는데 - 사실 아바타 시리즈가 <모노노케 히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일 겁니다. -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바타: 물의 길>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모노노케 히메>를 살펴보고 가려 합니다. 아바타 시리즈가 <모노노케 히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만큼,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서 아바타 시리즈의 성취와 한계를 파악할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이 나라는 깊은 숲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곳에는 태곳적으로부터의 신들이 살고 있었다.”
모노노케 히메의 시대적 배경은 무로마치 시대입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강력한 중앙 권력을 형성하지 못해 전란과 하극상이 끊이지 않는 불안정한 시대였습니다. 이는 영화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나는데, 아시타카가 동북 지방으로 여정을 떠나는 동안 마을을 습격하는 도적 떼를 만나는가 하면, 폐허가 되어 아무도 남지 않은 마을에서 잠을 자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노노케 히메>의 주요 공간적 배경인 ’타타라 마을’은 바로 이런 무로마치 시대의 불안정한 정세를 틈타 혁명가인 에보시가 건설한 마을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노노케 히메>의 시대적 배경을 무로마치 시대로 설정한 이유는, 이 무렵부터 인간과 자연의 비대칭적인 관계가 깨지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에보시는 타타라 제철 기술을 활용하여 총과 화포를 생산하고, 이는 인간이 자연을 개척하는 중요한 무기로 활용됩니다. 서로 대등한 관계에 있었던 인간과 자연의 균형이 무너지고, 인간이 자연을 압도하기 시작한 시대가 바로 무로마치 시대라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생각했던 것이죠. <모노노케 히메>는 결국 인간이 (사슴신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권력을 쓰러뜨리고 인간 세계에 가져오게 되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바타 시리즈도 <모노노케 히메>와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합니다. 아바타 시리즈의 배경은 인간이 자연을 압도한 것으로 모자라, 결국 지구의 자원을 모두 소모하고 우주로 진출하게 된, 아니 진출할 수밖에 없어진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지구에는 자원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판도라 행성으로 대표되는 우주로 진출하게 됩니다. 인간과 자연의 비대칭적 관계로 인해 인간과 자연 모두가 공멸할 위기에 처한 근미래가 바로 아바타 시리즈의 배경이라 할 수 있죠. 여기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한 가지 층위를 더 추가하게 되는데, 바로 유럽인들에 의한 ‘신대륙’ 진출입니다.
신대륙이라는 표현은 다분히 유럽 중심적인데, 그곳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과 달리 인간과 자연의 대칭적 관계를 존중하고, 지키며 사는 법을 알고 있었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 시리즈 속에 이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해 왔습니다. 작중 배경인 판도라 행성은 지구로부터 4.37광년 떨어진 알파 센타우리에 속해 있어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세계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아바타 시리즈에 묘사되는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 ‘나비’족은 외형을 제외하면 - 사실 어떻게 보면 외형까지도 - 기묘하게 친숙합니다. 이는 판도라 행성과 그 원주민인 나비 족이 사실은 ‘신대륙’ 아메리카 대륙과 그 원주민들을 그대로 차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아바타> 1편이 개봉했을 때, 테크놀로지로 구현된 상상력이라는 평을 받으면서도 그 상상력에 대해서는 크게 호평을 받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 또한 판도라 행성의 자연이 가진 어떤 특징 때문에 흐려진 부분이 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자연은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자연은 인간이 기술을 통해 얻어야만 했던 것들을 - 자동차, 비행기, 인터넷과 같은 -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나비 족이 (지구를 착취해 자연을 망가뜨린) 인간과 달리 판도라 행성의 자연과의 대칭적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자연이 충분히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고 있기 때문에 그 대칭적 관계를 깨뜨릴 필요가 없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인간이 테크놀로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판도라의 행성은 이미 베풀어주고 있으까요.
이런 이유로 아바타 시리즈를 보는 동안 ’인간과 자연의 관계 탐구’라는 주제 면에서 깊이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비꼬아서 생각하면 아바타 시리즈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면도 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자연은 신경망을 통해 모든 것이 연결되는데 지구의 자연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지구를 착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바타 시리즈는 인간과 자연의 탐구라는 측면에서 깊이가 떨어집니다. 이 측면으로만 영화를 본다면 확실히 아바타 시리즈는 별로 흥미롭지 않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대칭적 관계를 존중하고, 지킬 줄 안다는 나비 족이 살아가는 방식 또한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데, 이들의 생활사가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서구인의 방식이 아닐 뿐이죠. 이 문제는 <아바타: 물의 길>에 와서 더욱 악화되었다면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제이크가 이룬 가족의 생활 방식이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모습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바타: 물의 길>에서는 무분별한 포경 산업의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는데, 그 방식이나 논리가 지나치게 납작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외계 종족 ’툴쿤’은 지구의 고래를 은유하고 있다는 것을 감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많은 요소들이 그렇듯이) 툴쿤은 지구의 고래를 과장한 종족인데, 이 과장 때문에 빈약한 논리의 문제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툴쿤은 판도라 행성에서 가장 지혜로운 종족이며, 나비 족의 친구에 소중하다고 묘사되는데 지능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이러한 태도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를 내재하고 있습니다.
아바타 시리즈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모노노케 히메>를 가져왔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이항대립이라는 주제에서 보았을 때 아바타 시리즈가 납작해 보이는 이유를 <모노노케 히메>는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바타 시리즈는 환경주의 메세지를 담기 위해서 자연을 이상화하고 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설정상 판도라 행성은 지구와 달리 굉장히 위험하고 냉혹한 장소라고들 말하는데,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이를 실감하기는 어렵습니다. 영화는 자연의 그런 측면을 보여주길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모노노케 히메>가 환경주의적 메세지에 있어서 아바타 시리즈보다 더 깊이 있게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점을 감추지 않고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사슴신입니다. 사슴신은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망가뜨리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관객들은 사슴신이 지혜로운 존재인지 아둔한 존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슴신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연 측에서도 반발을 불러옵니다. 대표적인 존재가 성성이들입니다. 성성이들은 자연의 어리석음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성성이들은 인간과 자연의 대칭적 관계를 회복하려다 지쳐버린 종족으로, 인간을 잡아 먹으면 강해질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연 또한 인간처럼 어리석고 추악한 면이 있다는 것을 성성이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노노케 히메>는 이런 자연의 이면을 감추지 않고 보여주면서 주제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듭니다. 이것이 아바타 시리즈가 간과한 지점이죠. 하지만 아바타 시리즈가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고자 하는 주제는 따로 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사실상 데뷔작인 <터미네이터>와 또 다른 대표작 <타이타닉>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진가를 발하는 주제의식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관계입니다. <터미네이터>는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하게 된 미래 세계를 묘사하며 인간이 기계에게 지배 당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타이타닉>은 당대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진 범선 ’타이타닉’이 고작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며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를 끝장내버린 사건을 그립니다. 벨 에포크 시대에는 기술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며, 앞으로 낙관적이고 아름다운 미래만이 펼쳐질 것이라 여겨졌지만 타이타닉의 침몰은 앞으로 서구 유럽 사회에 펼쳐질 미래가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판도라 또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테크놀로지를 통해 창조한 가상의 세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바타 시리즈를 인간과 자연의 관계 탐구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모순적이고 납작한 영화가 되어버리지만,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관계 탐구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꽤 흥미로운 논의점이 많습니다. 아바타는 실사(라이브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하이브리드 영화입니다. 물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어비스>를 통해 컴퓨터 그래픽 분야를 개척한 이후로 수많은 영화들이 실사와 컴퓨터 그래픽의 융합으로 만들어졌습니다만, 아바타 시리즈는 다른 영화와는 비교도 안 될 규모로 컴퓨터 그래픽을 투입해서 제작되었습니다. 게다가 아바타 시리즈는 어디까지가 실제로 촬영된 라이브 액션이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장면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융합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2009년 <아바타>가 나온 후로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경계가 흐려진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도 <아바타>는 실사 영화라기보다는 애니메이션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냐는 주장이 있는데, 저는 이 글에서 해당 논의에 참가할 의사가 없습니다. 대신 제가 논하고 싶은 것은 기술은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다른 결론은 ’과학은 구분을 짓고, 기술은 그 구분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분류합니다. 종을 나누고, 매체를 나누고, 법칙을 나눕니다. 기술은 그 구분을 흐리게 만듭니다. 유전 공학 기술은 키메라를 만들고, 컴퓨터 그래픽은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흐리는 것처럼요. 결국 발전된 기술은 키메라의 창조를 향하게 됩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통해 자신만의 키메라를 만들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를 만들 때 (비록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연출자 팀 밀러의 반대로 인해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인간과 터미네이터 사이에서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설정을 넣고자 했다는 것과, 그의 오랜 드림 프로젝트가 사이보그화 되는 인간을 통해 ’어디까지가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총몽>이라는 것은 이런 시각에서 보면 꽤나 일관적인 행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관계’라는 주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잘 어우러지지 못했고, 그 결과 영화의 환경주의적 메시지가 납작하게 보이게 되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현재까지의 아바타 시리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는 주제와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관계’라는 두 가지 주제를 효과적으로, 또 매끈하게 연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두 주제가 충돌하면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죠.
앞으로의 아바타 시리즈는 이 두 가지 주제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아바타: 물의 길>과 마찬가지로 후자가 전자를 압도해 버린다면, 아바타 시리즈는 앞으로도 ’납작한 주제를 반복할 뿐인 기술 데모 영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두 주제를 성공적으로 통합해낸다면, 아바타 시리즈는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통찰을 담은 시리즈로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바타 시리즈는 이런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기대할 가치를 지닌 시리즈라고 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