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이야기 할 작품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 드립니다. 이 타래는 특성상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이어질 수밖에 없으니, 아직 작품을 보지 않았고 앞으로 볼 의향이 있는 분들은 타래를 뮤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에 앞서 그가 〈바람이 분다〉를 만들고 은퇴를 선언하게 된 배경을 하나 말씀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람이 분다〉를 만들고 은퇴를 선언하게 된 것은 〈바람이 분다〉를 만들면서 기력을 모두 소진해버린 탓도 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73살이 되면 죽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73살에 돌아가셨거든요. 이는 추측이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벼랑 위의 포뇨〉를 만들 때부터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를 불러다 종종 불러다 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벼랑 위의 포뇨〉를 만들 때 미야자키 하야오의 나이가 66살이었고, 〈바람이 분다〉를 만들 때 미야자키 하야오의 나이가 70살 내외였으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입장에서는 숨 가쁘게 이어온 작품 활동을 멈추고 죽음을 준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붓을 내려 놓지 못했습니다. 평생 동안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온 그였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는 삶을 견디지 못했던 탓일 수도 있고, 지브리 스튜디오가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인물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구조가 되어버린 탓일 수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13년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와 다카하타 이사오의 〈가구야 공주 이야기〉 두 편이 개봉했는데도 불구하고 지브리 스튜디오는 적자를 기록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규모가 너무 커진 탓에 어지간한 흥행으로는 수익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2014년 지브리 스튜디오의 제작부는 해체되었고, 지브리 스튜디오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2015년이 되었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74살이 되었지만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장편 영화에서는 은퇴했지만 단편은 계속 만들겠다’고 선언하고는 12분 분량의 단편 〈털벌레 보로〉를 만들기 시작한 거죠. 〈털벌레 보로〉를 만드는 동안 지브리 스튜디오는 다시 생기를 되찾았고, 제작부도 재정비 됩니다. 다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준비를 마치게 된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작품이 바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유작으로서는 어딘가 아쉬웠던 〈바람이 분다〉, 지브리 제작부의 해체, 73살이라는 나이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뒤엉키면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작품의 독해에 들어가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책이 몇 권 있습니다. 요시노 겐자부로의 동명 소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존 코널리의 소설 〈잃어버린 것들의 책〉,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입니다. 단테의 〈신곡〉도 빼놓을 수 없죠.
이번 영화는 요시노 겐자부로의 소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제목을 따왔기 때문에 개봉 전까지 대외적으로는 이 작품의 영화화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뚜껑을 열어 보니 웬 걸,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야속하게도 원작 크레딧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있었죠.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영화와 원작으로 알려졌던 동명 소설의 접점은 주인공 마히토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유산으로 남긴 해당 책을 읽는 장면 뿐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진정한 원작은 요시노 겐자부로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는,
존 코널리의 〈잃어버린 것들의 책〉에 가깝습니다. 이 작품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기획서에 언급이 되어 있으며,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작으로 삼고자 했지만 판권을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이 트윗 내용은 팩트 체크를 못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타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타래의 제목은 〈엔드 오브 왜갈게리온〉… 아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양면성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선 작품의 주인공인 마히토와 왜가리에 대해 살펴본 후, 주요 키워드를 따라서 작품을 독해해 보겠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마키 마히토’입니다. 마키 마히토라는 이름은 예사롭지 않은 이름입니다. 마히토라는 이름을 한자로 풀면 牧眞人(목진인)이 되는데 상당히 특이한 이름입니다. 牧(칠 목)은 ’목축업’을 할 때의 그 ’목’으로 가축을 치다, 다스리다, 키우다, 때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眞(참될 진)은 ‘진실되다’ 할 때의 그 ’진’으로 거짓이 아닌 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人(사람 인)은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마히토라는 이름은 ’참된 사람’이라는 건데 상당히 독특한 이름이죠. 마히토가 돌로 자신의 머리를 때리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마키 마히토’란 이름은 정말 문자 그대로의 사실을 담고 있는 이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히토의 이름은 작중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는데, 개중에 키리코가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마히토, 진실된 사람이라. 그래서 그런지 죽음의 냄새가 풀풀 나는구나.”
’진실된 사람’이 어째서 죽음과 연관 지어지는 걸까요? ’진실’이 ’죽음’과 연관 되는 건 이 대사 뿐만이 아닙니다. 마히토가 탑에서 다른 세계로 진입한 후,
거대한 무덤 앞에서 눈을 뜨게 되는데 이 무덤에는 ’나를 배우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이는 ’진실을 아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뜻이라 봐도 무방한데, 이처럼 영화는 진실과 죽음을 계속해서 연관 짓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마히토라는 캐릭터에 대해 깊게 들어가기 전에 우선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마히토는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을 반영한 캐릭터일까요? 마히토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반영했다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마히토의 배경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닮은 구석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만 볼 때의 이야기로,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마히토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마히토는 미야자키 하야오인 동시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닙니다.
즉 ’마히토는 미야자키 하야오다’라는 명제는 참인 동시에 거짓입니다. 이와 같은 ’참인 동시에 거짓이다’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화를 지배하는 중요한 모티브이기도 합니다. 참이 있으면 거짓이 있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이
영화는 계속해서 양면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면성’은 영화의 주제의식이기도 합니다. 마히토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연관성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속 등장인물들은 현실의 인물들과 1:1 대응이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지브리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로, 그는 왜가리가 자기 자신을 모티브로 했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저는 이러한 해석을 거부합니다. 그보다는 모든 캐릭터가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을 반영하고 있다 보는 게 맞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히토는 미야자키 하야오인 동시에 아닌 것이기도 한 거고요.) 이것은 타래의 내용이 전개되면 전개될수록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다시 마히토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히토는 이름처럼 진실된 인간입니다. 일반적으로 진실되다는 건 긍정적으로 여겨집니다. ’진실’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마히토는 마냥 긍정적이기만 한 사람은 아닙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제대로 보려면 보이는 것 너머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히토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마히토는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소년입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마히토는 마냥 의젓하기만 한 캐릭터가 아닙니다. 사실 마히토의 본질은 반항아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마히토는 어른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게다가 마히토는 아버지를 싫어합니다.
새어머니인 나츠코가 큰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뒤, 마히토에게 ’추우니까 이불을 덮고 자라’고 말합니다. 다음 장면에서 마히토는 이불을 덮지 않고 있습니다. 곧 마히토는 방에서 나가 계단에서 졸다가 꿈을 꾸게 되는데요,
바로 여기서 마히토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현관문이 열리면서 어머니를 죽인 불길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데, 마히토가 꿈에서 깨자 현관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가 들어옵니다. 즉 마히토에게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인 바로 그 불길인 것입니다.
그런 마히토에게 나츠코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죽고 바로 다음 해에 아버지는 어머니의 동생인 나츠코와 재혼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까지 임신을 한 겁니다. 마히토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결국 마히토에게 ‘발 디디고 살아야 할 현실’=‘나츠코’=’부조리한 세계’라는 도식이 완성됩니다. 세상은 전쟁으로 인해 불길에 휩싸였지만, 마히토가 살고 있는 세계는 평화롭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서도 아버지는 처제와 사랑을 하고, 아기를 잉태하기까지 합니다.
마히토가 나츠코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사는 세계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삶에 대한 부정과 현실의 도피로 이어지게 되죠.
반항아 외에 또 다른 마히토의 본질은 ’도련님’입니다. 극중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영화를 자세히 보면 마히토는 사무라이 가문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극 후반에 아버지가 일본도를 패용하는 장면에서 분명해집니다.)
마히토의 아버지가 마히토를 끔찍히 아끼는 탓에 마히토는 또래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죠. 마히토와 친구들 사이에는 계급의 격차가 있거든요. 결국 아버지와 가정 환경에 대한 혐오는 마히토가 돌로 스스로의 머리를 내리치게 만들기에 이릅니다.
마히토가 자해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츠코도 병들게 됩니다. 나츠코가 아픈 이유는 명시적으로는 입덧 때문이지만 사실은 마히토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츠코는 마히토가 자신들 때문에 자해를 했다는 사실을 눈치 챘기 때문입니다.
나츠코가 마히토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마히토와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할 현실 사이의) 불화를 상징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는 거죠.
이처럼 마히토는 복잡성을 가진 캐릭터입니다. 의젓해 보이지만 반항심을 가지고 있고, 자해를 해서 주변 사람들을 상처 입히기도 합니다. 게다가 영화 내내 ’건방지다’란 꼬리표가 마히토를 따라 다니는데,
도련님인 데다 반항아기도 하니 건방지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셈입니다. 게다가 마히토에게는 그림자가 있으니, 바로 죽음을 향한 충동이자 욕망, 즉 타나토스입니다. 그리고 이 타나토스를 형상화 한 캐릭터가 바로 왜가리입니다.
마히토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으니 왜가리는 핵심만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왜가리는 마히토의 이면입니다. 어머니를 상실한 이후 마히토는 죽음을 향한 충동을 느끼고 있는데, 이것이 형상화 된 캐릭터가 바로 왜가리입니다.
게다가 왜가리는 마히토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왜가리라는 새는 멀리서 보기에는 고고하고 아름답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추악함이 보입니다. 이는 왜가리뿐만 아니라 모든 아름다움이 그렇습니다. 아름다움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거긴 추악함이 있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나비는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크게 확대해서 보면 끔찍할 정도로 징그러운 벌레의 형상이 드러납니다. 세상은 자세히 관찰할수록 추악한 면이 보이게 되고, 이는 세상에 대한 혐오와 염세주의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왜가리의 속에는 코가 크고 이상하게 생긴 아저씨가 들어 있습니다. 왜가리 속의 아저씨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이 오갔는데 (오죽하면 이 왜가리가 데즈카 오사무를 뜻한다는 해석까지 있을 지경) 저는 이 왜가리의 형상이 ’일본인’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관념 속 형상이라 생각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왜가리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닮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고고하고 아름답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초라하고 볼품 없는 일본인 아저씨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싫어해, 서구에 대한 동경심을 품었던 미야자키 하야오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여기서 의아하신 분도 있을 겁니다. 미야자키 하야오하면 일본 민속을 아름답게 표현한 감독이 아니던가요? 〈모노노케 히메〉도 그렇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그런 작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들 작품을 만들기 전까지, 하야오는 주로 서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만들어 왔습니다.
서구에 동경심을 품었다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스스로도 인정한 내용입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화 자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웃집 토토로〉를 만들던 시기에 이르러서야 일본이라는 나라를 ’재발견’하게 되었다고 털어놓기도 했죠.
결국 왜가리는 마히토의 이면이자 그림자입니다. 왜가리는 마히토가 죽음에 대한 충동을 느낄 때마다 등장해 죽음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하는 데서 분명해집니다. 게다가 왜가리가 마히토의 이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가리가 ’거짓말쟁이’라는 겁니다.
이는 ’진실된 사람’인 마히토와 분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마히토의 ’진실’과 왜가리의 ’거짓’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계속해서 강조되는 모티브 중 하나입니다. 극중에서 키리코가 말하죠.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을 말한다. 이건 진실일까, 거짓일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고전 영화나 고전 애니메이션에서 많은 것을 따오는 편입니다. 이번 작품도 예외는 아니며 장 콕토의 영화에서 많은 것을 따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장 콕토의 영화 〈오르페〉와 마찬가지로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장 콕토가 재해석한 오르페우스 신화인 〈오르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오르페우스 신화와는 다른 점들이 많습니다. 장 콕토는 이 영화에서 오르페우스가 아내가 아닌 ’죽음’과 사랑에 빠졌다고 재해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르페〉 속 오르페우스는 명시적으로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지만 사실은 ’죽음’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 거울 속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히토가 왜가리가 있는 탑의 세계로 가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시적으로는 나츠코를 구하기 위해서이지만 한편으로는 불이 되어 사라진 어머니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고 있죠. 마히토는 탑의 세계가 죽음의 세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양가감정을 품은 채 걸어 들어갑니다.
탑에 들어간 마히토는 왜가리와 맞서 싸우던 중 ‘책을 읽다 정신이 이상해진 뒤 실종된’ 큰할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큰할아버지를 처음 만날 때, 할아버지는 장미를 떨어뜨리면서 등장하는데 이 또한 장 콕토 영화의 오마쥬입니다. 정확히는 〈미녀와 야수〉죠.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에서 장미는 중요한 소재로 등장합니다. 이처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는 〈미녀와 야수〉에서 따온 요소들이 많이 등장하죠. 이번 작품은 그것이 가장 노골적인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장 콕토는 자의식이 매우 강한 예술가였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장 콕토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 콕토의 작품들이 그렇듯) 작품을 메타적으로 보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암묵적인 요청을 받게 됩니다.
마히토와 키리코, 그리고 왜가리는 큰할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지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지하 세계는 죽음의 세계인 동시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삶 속 ’애니메이션 산업’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지하 세계가 애니메이션 산업의 세계라는 것은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세 가지 키워드에서 자명해집니다. 이 세계는 책, 새, 돌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책은 이야기이고, 새는 움직임이며, 돌은 무생물입니다. 애니메이션은 이야기 속에 움직임이 부여된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무생물이고요.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늘을 동경하여 평생동안 새와 비행기를 그려온 애니메이터라는 점을 고려하면 ‘새’라는 소재는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날개를 움직여야’ 합니다. 애니메이터들이 새의 날갯짓을 그려야만 만화 속 새는 하늘을 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움직임만으로 애니메이션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이 비로소 애니메이션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의 근원은 책에 있죠. 그래서 큰할아버지의 탑에는 책이 빼곡히 들어서 있습니다. 게다가 큰할아버지는 ‘책을 읽다 정신이 이상해진’ 인물이기도 하죠.
애니메이션의 어원은 ’생명의 숨결’에서 따온 라틴어 ’아니마’입니다. 살아있지 않은 것을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눈속임’이나 ’거짓’으로 애니메이션의 진짜 본질은 돌과 다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죠.
마히토는 이 지하 세계에 오자마자 펠리컨들에게 떠밀려 ‘거대한 무덤’의 문을 열고 맙니다. 이 장면은 대단히 직설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 펠리컨이라는 새를 ‘먹고 사는데 급급한’ 존재라 생각한다면 더욱 노골적인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먹고 사는 문제에 떠밀려 애니메이션 산업이라는 거대한 무덤의 문을 열어버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경험입니다. 마히토가 애초에 이 세계에 오게 된 이유가 돌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쳐서 자해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도련님’ 출신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해’의 일환으로 애니메이션 세계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크게 과장이 아닐 겁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터가 되었을 시기 일본에서 애니메이터는 대표적인 3D 직종 중 하나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욱이요.
여기서 마히토는 자신을 보살펴주던 유모(의 과거) 키리코를 만나게 됩니다. 키리코는 펠리컨들로부터 마히토를 구해주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키리코가 마히토를 직접 일으켜 세워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키리코는 마히토에게 스스로 일어서도록 독촉하죠.
이제부터 마히토는 키리코와 같은 처지에서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처지에서) ’자립’해야만 하는 겁니다. 물고기 배를 가르는 것처럼 궂고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야 하는 처지가 되죠.
키리코의 역할은 물고기를 잡아서 와라와라들을 배불리 먹이는 겁니다. 물고기로 영양을 채운 와라와라들은 하늘을 날아 현실에서 태어날 수 있게 되죠.
이는 애니메이션과 같은 미디어 산업의 역할과도 닮은 데가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역할 중 하나는 결국 현실에 지친 관객들이 잠시 현실을 도피하는 즐거움을 줘서, 다시 현실로 돌아갈 힘을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해 이런 식으로 메타적인 은유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까요. 유바바의 목욕탕은 신들이 속세의 때와 피로를 풀기 위한 장소이며, 이는 애니메이션의 은유 중 하나기도 합니다.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도망쳐서 온 지하 세계이지만 이곳에서도 여전히 부조리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와라와라들이 지상에서 태어나기 위해 하늘로 떠오르자 배고픈 펠리컨들이 찾아옵니다. 펠리컨들은 와라와라를 잡아먹죠.
결국 지하 세계도 현실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함이 도사리고 있는 세계임이 드러납니다. 이때 ’불의 화신’인 히미가 나타나 펠리컨들을 불태우지만, 그 과정에서 와라와라들도 희생되고 맙니다.
마히토는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세상의 양면성을 배웁니다. 이 세상이 부조리한 이유는 세상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결국 다른 존재를 희생시켜야만 성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을 인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은하철도의 밤에는 고결한 희생을 선택한 한 전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의 생명이 다른 존재의 희생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전갈은 스스로를 희생해 빛나는 불이 됩니다. 마히토가 죽어가는 펠리컨을 보며 깨달은 것이자, 마히토의 어머니=히미가 불과 하나가 된 이유기도 합니다.
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은유로 돌아온다면 이런 깨달음의 바탕에는 ’아름다움을 동경해서 발 딛고 있는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들어왔지만 결국 이곳도 배고프고 도망칠 수 없는 곳’이었던 경험이 있었겠죠. 결국 도피해서 온 이곳도 지상의 세계와 다를 바 없는 지옥이었던 겁니다.
이런 염세주의적 세계관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피어납니다.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할 현실도 부조리함과 전쟁으로 가득한 지옥이고, 도망쳐서 도착한 곳도 부조리함과 굶주림으로 가득한 지옥이라면 이런 세계에서 생명이 태어날 가치가 있을까요?
게다가 어느 쪽이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미래를 착취해서 성립될 수밖에 없다면 일을 피할 수 없다면 태어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세상은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이를 임신한 나츠코가 탑의 세계 = 지하 세계 =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부조리함으로 가득 해서 살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현실은 서로에게 상처만을 안기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나츠코는 그저 마히토의 아버지를 사랑했을 뿐이지만 그것은 마히토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에는 자해를 하게 만듭니다. 마히토는 부모와 친구에 대한 반발, 부조리한 처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자해를 했을 뿐이지만 그것은 나츠코에게 상처를 주고 맙니다.
결국 인간은 본의 아니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 ’앞으로 태어날 존재에게 살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세계인 것입니다.
〈엔드 오브 왜갈게리온〉의 주제곡을 듣고 가시겠습니다.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에 앞서 빠뜨릴 뻔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도록 하죠. 마히토는 키리코와 지내는 동안 ‘식탁 아래에서’ ‘할머니 인형들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는데 여기에는 두 층위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이 타래 자체가 두 층위를 계속 오가고 있습니다만)
작품 내적인 논리의 층위에서 이 장면은 마히토가 산 자이기 때문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는 생명의 보충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식탁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작품 외적인 논리, 즉 메타적인 해석의 층위에서 이 장면은 마히토=미야자키 하야오가 경제적으로 유복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산업에 들어온 후에도 버티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키리코+펠리컨 챕터가 끝나고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갑니다. 바로 히미+앵무새 챕터입니다. 펠리컨이 ‘먹고 사는데 급급한’ 개별 인간의 생존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다면 앵무는 ‘모여서 사회를 이룬’ 집단 인간의 군중성을 상징합니다.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있는 앵무새들이지만 이들은 펠리컨과 마찬가지로 굶주려 있습니다. 왜가리는 이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펠리컨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결국 개별 인간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더라도 본성은 달라지지 않으며, 잔혹성과 야만성이 커질 뿐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펠리컨 ➡️ 개별 인간
앵무새 ➡️ 인간 집단
여기서 마히토는 고대하던 어머니, 히미를 만나게 됩니다. 불꽃과 하나가 되어 사라진 존재이자 마히토가 죽음을 욕망하게 된 이유이기도 한 존재입니다.
앞서 인용한 〈은하철도의 밤〉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히미의 불은 생명의 불입니다. 불은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을 살아가도록 해주기도 합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런 양면성의 모티브가 계속해서 변주되며 등장하지요.
마히토를 만난 히미는 마히토와 함께 식사를 합니다. 마히토가 그토록 염원해왔던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순간이 결국은 허구라는 것을 의식하지만 않는다면요.
히미가 마히토에게 발라주는 달콤한 잼의 이름은 Tomorrow Jam(내일의 잼)입니다. 이 잼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 속 Jam Tomorrow라는 표현의 패러디입니다. ’이루어지지 못할 달콤한 약속’을 뜻하며 정치인들의 허황된 공약 같은 것을 풍자할 때 쓰이기도 합니다.
서늘하다면 서늘한 장면이지만 한편으로는 애니메이션의 역할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애니메이션이란 결국 허구를 통해 잠시나마 현실로부터 도피해, 현실을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한 매체니까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장면은 서늘하다기보다는 따스함을 가진 장면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살아갈 힘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낭만적인 생각인가요. 이 장면의 온화함은 바로 이런 낭만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어려워지는 지점으로 들어가 봅시다. 많은 분들이 이해에 어려움을 겪었을 부분입니다. 나츠코가 지하 세계로 들어온 이유와, 그녀가 ’돌’과 계약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살펴 본 방식과 같이, 이 부분은 두 층위에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작품 내적인 이야기 논리 층위에서고, 다른 하나는 작품 외적인 메타적인 층위에서입니다. 우선 전자부터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츠코가 지하 세계로 내려와 아이를 낳기로 한 것은 부조리한 모순과 서로를 상처 입히는 일들로 가득한 현실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츠코가 지하 세계로 내려간 시점이 마히토가 돌로 머리를 내리친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떠올립시다.
그래서 나츠코는 지하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자 ’거대한 무덤’의 주인과 계약을 했습니다. 이 거대한 무덤의 주인은 바로…
’돌’입니다. 많은 분들이 지하 세계의 주인이 큰할아버지라 생각하셨겠지만 사실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진정한 주인은 바로 돌입니다. 살아있지 않은 무생물인 데다, 인간의 손에 들려져서 도구가 되어야 할 돌이 여기서는 주인이 되어 있죠.
하지만 돌은 스스로 이 세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 세계를 계속해서 만들고 유지할 창조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돌’과 ‘큰할아버지’ 사이의 계약입니다. 돌은 큰할아버지에게 세계를 창조할 힘을 주는 대신, 자신이 주인이 되는 세계를 유지하도록 계약을 했습니다.
하지만 큰할아버지의 삶 또한 유한하기 때문에, 그의 뒤를 이어 세계를 만들고 유지할 존재가 필요합니다. 발 딛고 살아가야 할 현실의 부조리한 모순과 상처에 지친 나츠코는 돌과 계약한 것이죠.
계약의 내용을 추측해보면 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하 세계를 만들고 유지할 혈육을 낳아줄 테니 아이가 이 세계에서 평화롭고 상처를 입지 않으며 살아가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었을 겁니다.
나츠코가 아이를 낳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는 산실에 찾아가는 것이 금기(터부)가 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거대한 무덤이자 지하 세계의 주인에게 나츠코가 낳을 아이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 세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나츠코가 낳을 아이가 필요하거든요.
히미와 마히토는 그런 나츠코를 구해서 다시 현실로 데려오기 위해 금기를 깨고 나츠코가 있는 산실까지 찾아갑니다. 이것은 금기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히미도 여동생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죠.
마히토가 산실로 들어가 나츠코를 깨우자, 나츠코는 마히토에게 왜 자기를 따라왔냐며 화를 냅니다. 부조리한 현실, 상처를 주는 타인을 피해 지하 세계로 온 그녀에게, 마히토는 피하고 싶었던 모든 걸 일깨우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으로 진심을 고백합니다. ’난 너가 싫다’고.
하지만 마히토는 지하 세계에 오기 전의 마히토와는 다릅니다. 지하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마히토는 세상이 단순하지 않고 모순된 양면성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배웠죠. 마히토는 마침내 발 딛고 살아야 할 현실을 받아들이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타인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여기서 한 권의 책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바로 매튜 배리의 〈피터 팬〉입니다. 이 책이 나온 후, 학자와 평론가들은 피터 팬을 이야기하기 위해 작가인 매튜 배리와의 연관성에만 주목했습니다. 이 소설은 매튜 배리의 심리적 소인증으로 인한 어른 되기의 거부에 불과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죠.
정작 이 소설 속 ’네버랜드’의 역할에 대해 주목이 이뤄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피터 팬은 어린이들의 순수함과 상상력을 강조하는 작품이라 여겨지지만 사실 이 책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점이 눈에 많이 띕니다.
네버랜드는 대단히 양면적인 세계입니다. 피터 팬은 순수한 만큼 잔혹하다는 것은 이제는 피터 팬의 잔혹성만이 강조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피터 팬의 잔혹함만 강조되는 해석은 자극성에 호도된 괴담입니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네버랜드가 정말 상상력으로 가득 찬 현실 도피의 세계냐는 겁니다.
그런데 네버랜드는 사실 대단한 상상력으로 이뤄진 세계가 아닙니다. 네버랜드에 해적들이 들끓는 이유는 피터 팬이 쓰여질 당시에 해적을 소재로 한 모험물이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버랜드를 구성하는 인디언이나 인어와 같은 존재들도 사실은 당시에 인기를 끌고 있던 작품들에서 따온 것들로, 네버랜드의 세계는 사실 ’어디선가 본 것들’로 구성된 세계입니다. 사실 어린이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으며, 〈피터 팬〉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이 진정 뛰어난 것은 상상한 것을 진짜라 믿는 힘입니다. 어린이들은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조잡한 상상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세계에도 곧잘 이입해서 현실을 떠나 모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구현된 세계가 바로 네버랜드입니다.
〈피터 팬〉을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네버랜드의 묘사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버랜드는 상상으로 이루어진 놀이 세계인데, 피터 팬과 웬디의 역할 수행이 일반적인 성 역할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피터 팬은 아버지 역할을 수행하며 모험을 즐기고,
웬디는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며 집안일을 하면서 피터 팬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무른다는 거죠. 이들의 역할이 당대 성별 관념에 고정되어 있다는 비판은 어느정도는 타당한 면이 있지만 이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네버랜드에서 놀이의 역할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상상으로 이루어진 놀이의 세계는 현실에 대한 모방을 기반으로 합니다. 피터 팬과 웬디의 놀이가 고정된 성별 관념과 역할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현실 세계의 성별 관념과 역할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을 보면서 그것을 따라할 뿐입니다.
이런 어린이들의 현실도피적인 모방은, 나아가 그런 현실도피적인 모방으로 이루어진 네버랜드의 세계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실을 살아갈 연습’이라는데 있습니다. 웬디는 네버랜드에서 어머니 역할을 모방하는 놀이를 통해 현실에서 어머니가 될 준비를 합니다.
결국 네버랜드는 현실로부터 그저 도피하기만 하는 부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시뮬레이션의 세계이기도 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네버랜드의 의의이며, 이러한 네버랜드적인 요소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마히토는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세상은 모순적인 부조리와 양면성으로 가득 하고 타인을 상처 입히며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정면으로 부딪히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과, 지하 세계의 모험을 통해서요.
이렇게 마히토는 나츠코를 어머니로 인정하게 됩니다. 나츠코를 어머니로 인정하는 것은 결국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수용과 인정을 의미합니다. 마히토의 행동은 나츠코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나츠코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돌과 나츠코 사이의 계약이 파기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히미는 계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이것은 돌의 분노를 삽니다. 나츠코가 현실로 돌아가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지하 세계는 더 이상 유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작품 내적인 내용 층위에서의 해석은 잠시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히미가 앵무새에게 납치되고, 마히토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장면부터는 작품 내적인 내용 층위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스스로 메타적으로 해석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본인 작품 속 장면이나 표현이 끊임없이 오마쥬 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탑으로 연결되는 숲의 모습부터가 〈이웃집 토토로〉에서 메이가 토토로를 만나기 위해 들어가는 숲의 모습을 연상시키면서 시작되고 이러한 셀프 오마쥬는 작품 내내 계속 이어지는데,
이는 앞서 말했듯 메타적인 해석을 요청하는 행위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서 작품 내적인 내용의 층위에서 해석한 장면을 이번에는 작품 외적인 메타적인 층위에서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츠코가 현실에서 아기를 낳기를 거부하고 지하 세계(=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들어온 것은 결국 창작자로서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창작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근간에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도피, 나아가 그런 현실에 대한 부정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런 부조리하고 가치 없는 현실을 왜 살아가야 하는가?’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부정적인 질문들로 가득합니다. 하야오는 이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합니다. 생각할수록 살아갈 가치가 없지 않은가 하는 고뇌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생철학(삶이란 무억인가)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노노케 히메〉 속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라는 대사 혹은 〈바람이 분다〉 속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야겠다’는 시의 인용이 그걸 보여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삶에 대한 강조는 사실 삶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은가 하는 염세주의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대는 아름다우니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아름다운 것과 살아야 하는 이유 사이에 연결고리를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본인도 그 연결고리를 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펠리컨이 와라와라를 잡아먹고, 히미가 펠리컨을 불태우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삶은 죽음에 기반해서 이루어집니다. 산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착취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앞으로 태어날 미래를 착취하는 것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나츠코와 나츠코가 자리를 잡고 있는 산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가장 강력한 모티브이자 창작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종이들이 히미를 보호하고 있는데, 이는 그림이 수많은 종이 위에 그려져서 성립되는 애니메이션을 연상 시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거의 모든 창작물은 바로 이런 염세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살아갈 이유가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갈 이유를 찾아보고자 사투한 결과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인 겁니다.
문제는 이러한 원동력, 즉 나츠코를 산실에서 해방시키고 현실로 돌려보낸다면 (삶의 가치를 찾아낸다면) 더 이상 이 지하 세계는 유지될 수 없게 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가 지브리 스튜디오의 해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요.
일련의 행위(나츠코를 지하 세계 속 산실에서 꺼내어 현실로 데려가려는 행위)는 지하 세계의 존속에 위협이 됩니다. 돌과 지하 세계 속 주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암묵적인 ’계약’이 깨진 거죠. 이는 지하 세계=거대한 무덤의 주인인 ’돌’을 분노하게 만들고 어떤 존재를 자극합니다.
그 존재가 바로 앵무새 왕입니다. 앵무새 왕이 상징하는 바를 놓고 많은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특정 인물이나 애니메이션 감독에 1:1 대응을 하려는 시도도 있죠. 하지만 앞서 말했듯, 저는 이러한 특정 인물과의 1:1 대응을 거부합니다.
앵무새 왕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앵무새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앵무새는 군중으로서의 인간으로, 자기 목소리 없이 남의 말이나 행동에 따르기만 하는 전체주의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펠리컨과 앵무새라는 두 종의 새는 결국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는 인간들)을 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가까이서 보면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에 급급한 펠리컨이고,
멀리서 보면 자기 목소리 없이 목소리가 큰 앵무새 왕을 ‘두체(원수)’로 따르는 존재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야만적이라 ‘사람을 잡아먹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인간 사회라는 것이 결국 사람을 잡아먹는 시스템이라는 거죠. 급속도로 근대화가 이루어진 일본은 이런 야만성이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근대화에 따른 야만성을 지적한 작가가 바로 미야자와 겐지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미야자와 겐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의 주제의식을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는데, 이는 이쿠하라 쿠니히코도 마찬가지라 〈유리쿠마 아라시〉에서 중요히 다루기도 했습니다.
유리쿠마 아라시의 배경에는 늘 ’개발’의 풍경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유리쿠마 아라시의 세계에서 ’개인’은 개성이 없고 투명한 존재로 격하되고 오직 건물(시스템)만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나며, 사람을 잡아먹기도 합니다. 빠른 근대화는 시스템의 야만성을 극대화 했습니다.
앵무새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압축 근대화로 인해 그들은 앵무새로서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고, 개개인은 투명해졌으며, 사람을 잡아먹는 야만성을 가진 데다 목소리가 큰 앵무새 왕에게 복종하는 전체주의성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이끄는 앵무새 왕은 앵무새로서는 유일하게 자기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뚜렷한 개성과 자아 그리고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앵무새 왕의 목적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계의 현상유지’ 입니다.
앵무새 왕은 현재 지하 세계의 구조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는 큰할아버지가 계속해서 이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이는 권력자라면 응당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힘과 권력을 지닌 존재는 변화를 원치 않게 되죠.
물론 큰할아버지는 이제 늙고 지쳤으며, 살 날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할아버지는 이 세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창조자의 역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세계의 주민들과 한 가지 약속을 했을 겁니다. 본인은 창조자 역할을 떠나겠지만 혈육에게 자신의 뒤를 잇게 하겠다고요.
그 혈육이 바로 나츠코의 낳을 미래의 아이입니다. 하지만 마히토가 나츠코를 데리러 오고, 히미가 공식적으로 약속의 파기를 요청하면서 큰할아버지와 지하 세계의 주민들(특히 앵무새들)간에 관계가 틀어집니다.
결국 앵무새 왕은 약속을 파기한 히미를 납치하여 큰할아버지와 협상에 나서게 됩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현재의 세계를 유지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큰할아버지가 계속해서 이 세계를 이어가게 하려 합니다.
히미를 인질로 협상에 나선 앵무새 왕에게 큰할아버지는 또 다른 혈육이 자신의 뒤를 이을 여지가 있다며 그를 후계자로 만들어 보겠노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마히토가 마침내 만나게 되는 큰할아버지는 늙고 지친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겉모습으로, 큰할아버지의 실체는 따로 있습니다. 그는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 속 야수와 다름 없는 존재로,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입니다. 달리 말해 괴물이죠.
〈미녀와 야수〉에서 저주를 받아 괴물이 된 왕자처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큰할아버지도 저주를 받아 괴물이 된 존재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분별력을 요구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이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그는 괴물처럼 보이지 않지만요.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하나입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이야기 할 때 이 영화가 사실은 미야자키 하야오 버전의 〈미녀와 야수〉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울은 인간성을 상실해 괴물이 되는 저주에 걸린 존재라고요.
이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가오나시는 황금을 이용해 치히로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이 장면은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가 보석으로 벨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장면에서 따온 겁니다. 이처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는 장 콕토판 〈미녀와 야수〉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미녀와 야수〉 속 야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 하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속 큰할아버지는 모두 인간이었으나 저주를 받아 괴물이 된 존재입니다. 이들은 어떤 저주를 받아 괴물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성 상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연쇄적으로 발생합니다.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인간(人間)이라는 단어를 풀어 보면 사람 인(人)에 사이 간(間)을 써서 인간이라고 합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개체가 아니라 관계이자 네트워크입니다.
야수와 하울과 큰할아버지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힌 존재들입니다. 야수와 하울이 마침내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이런 만남과 사랑을 통해 ’관계’가 만들어지고, 다시 사람과, 세계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겉에 보이는 것만 봐서는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큰할아버지의 정원에 들어온 앵무새가 아름다운 풍경에 눈물을 흘리며 “너무나도 아름다워. 여기는 천국인가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되는 거죠. 이 세계는 사실 지옥이나 다름 없는데 말이죠.
이는 지브리 영화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에 속지 말고 그 안을 들여다 보라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큰할아버지는 등장만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인물을 떠올리게 만들죠. 이처럼 영화는 큰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순간 메타적으로 감상하기 시작할 것을 요구합니다.
지금까지 두 가지 층위에서 내용을 해석해 왔습니다. 하나는 영화가 내적인 논리적인 내용에 따른 층위고 다른 하나는 영화 외적인 메타적인 층위입니다. 큰할아버지의 등장을 기점으로 두 층위는 메타적인 층위에서 하나로 합쳐집니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지하 세계의 본질이자 주인을 소개합니다. 바로 돌입니다. 큰할아버지는 이 돌을 통해서 세계를 만들었고 지금도 만드는 중입니다. 이 돌은 큰할아버지에게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 힘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션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존재감 강한 감독 중 하나가 되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인간’보다 그가 만든 ’작품’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 것처럼. 큰할아버지도 자기가 만든 세계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죠.
돌의 본질은 ’무생물’이고 ’도구’입니다. 도구는 인간의 삶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것이 역전되어 버린 거죠. 인간이 돌이라는 무생물이자 도구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세계가 만들어지고 만 것입니다.
마히토는 이 돌을 보고 ’악의’를 깨닫습니다. 여기서 악의란 죽음을 향한 충동이자 타나토스입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란 충동이죠. 마히토는 돌로 스스로 자해를 해서 상처를 입은 경험을 가진 존재입니다. 타나토스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히토는 ’자신의 뒤를 이어 이 세계를 유지해달라’는 큰할아버지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큰할아버지가 만든 세계가 결국은 죽음의 세계라는 본질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마히토는 여행을 하는 동안 세상의 부조리함과 모순을 끌어안고 살 준비를 끝마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친구’로서 수용할 줄 알게 된 것이죠. 이것이 바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답이기도 합니다. 삶은 부조리한 모순과 양면성으로 가득합니다. 빛이 있는 만큼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것을 친구로서 끌어안고 살아야 합니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입히는 세상이지만, 결국 우리는 인간인 한 타인과 소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인간은 개체가 아니라 네트워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히게 되면 인간성 상실이라는 저주에 걸려 괴물이 되고 맙니다.
다시 마히토의 아버지를 떠올려 봅시다. 그는 부정적인 존재처럼 보입니다. 전쟁에 쓰이는 무기를 만드는 데다, 계급을 뽐내기를 좋아하며, 아내를 사별한 직후 그녀의 여동생과 결혼한 부조리한 행적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마냥 악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앞서 말한 행적들을 다르게 보면 그는 열심히 사는 인간이고, 아들을 끔찍할 정도로 아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마히토를 혼내지도 않는 데다가 아들을 위해 복수를 할 줄도 압니다. 그가 몰랐던 것은 마히토가 스스로 자해를 했기 때문에 친구에게 맞지 않았다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 뿐입니다. (마히토는 이름처럼 진실만을 말합니다.) 게다가 처제와 결혼을 한 것도 어쩌면 마히토가 정상가족 속에서 살기를 바란 탓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정말로 아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아버지니까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일본도를 패용하는 장면에서 극대화 됩니다. 이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들을 아끼는 아버지의 마음이 극에 달한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결국 세상은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복잡한 곳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추악함이 드러납니다.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갯짓은 고고하고 우아하지만 새들이 난 자리에는 새똥이 남습니다. 영화는 지독할 정도로 새똥을 강조합니다. 비행이 남기는 이면의 더러움이죠.
세상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러한 더러움을 받아들일 줄을 알아야 합니다. 마히토의 어머니가 요사노 겐자부로의 소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남기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일 겁니다.
더럽고 추악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 틀어박히지도 말라고요. 본인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다급한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추악함과 더러움을 보고, 경험하고 나서야 우리는 진정으로 이 세상의 참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결국 큰할아버지는 자기가 만든 이 거짓된 죽음의 세계가 이어지길 바라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마히토가 후계자가 되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앵무새 왕과의 협상을 거부했던 겁니다.
이는 변화를 바라지 않는 보수주의자인 앵무새 왕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앵무새 왕의 멘탈이 무너지게 되는 이유는 그가 지하 세계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사랑의 이면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그것이 본인의 심사대로 되지 않을 때, 여기서 ’배신을 당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세계를 파괴하는데 일조하게 되죠. 현상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보수주의자들이 퇴행을 하게 되고 전쟁을 벌이게 되는 아이러니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현재’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미래’를 파괴하고 재앙을 일으켜 버립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현상이 유지되지 않자 앵무새 왕은 결국 칼을 꺼내어 할아버지가 쌓아온 돌들을 반으로 도륙내 버립니다. 이는 이 세계를 이루는 근간인 ’돌’을 죽여 세계의 붕괴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이면을 보지 못하는 자’들의 말로입니다. ’현재’의 추악함과 더러움을 보지 못하고 마냥 아름답게만 여긴다면, 이는 퇴행과 파괴로 이어지게 됩니다. 열심히 사는 자들이 세계를 망가뜨리는 부조리의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미래를 긍정하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태어날 이들로 하여금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 위해서는 결연하게 ’현재’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추악함과 더러움, 그리고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수용하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를 주고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비로소 미래의 세대들에게 우리는 ’태어나도 괜찮다’라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수용은 삶과 미래를 긍정하기 위한 사투의 결과입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결국 우리는 살기 위해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철학의 세계에 너무 깊이 함몰되어선 안 됩니다. 큰할아버지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히게 되는’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삶을 긍정하기 위한 사투와 현실로 도피하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도피에 빠져서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세상의 부조리와 타인과의 관계에 의연하게 맞서야 합니다.
그래서 왜가리가 ’탑에서 경험한 것들을 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비현실의 세계에 너무 빠져들게 된다면 소년소녀들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죠.
미야자키 하야오가 늘 말해왔던 것처럼, 비현실에서 경험한 기억들을 망각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그 경험에서 배운 것들을 필요로 할 때, 그 기억은 부적처럼 되돌아와서 우리를 지켜주게 될 테니까요.
영화는 마히토가 가방 속에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집어 넣고 다시 도쿄로 떠나면서 끝이 납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답입니다.
삶에는 철학(=책)이 필요합니다. 어떤 철학이든 괜찮습니다.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문자 그대로의 철학 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철학에 함몰되지 않는 겁니다. 살아가기 위한 소중한 한 권의 책이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질문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삶을 ’모순’과 ’실패’로 규정하며, 무작정 본인을 따르지 말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관점과 분별력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을 작품 속에 담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타래를 쓰기까지는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 작품을 해설한다는 것 자체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해서 결론을 얻어내길 바라는 작품에 대고 구구절절 설명을 한다는 것은 영화가 가진 마법을 해제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도 있었습니다.
이 글 자체가 사람들을 선동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앵무새 왕의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되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꼬박 3년이 넘는 시간동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대한 글을 써왔습니다. 덕분에 많은 기회도 얻었고 (지난 단편영화를 찍을 때 타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커리어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야자키 하야오를 이용해
개인적인 부를 얻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각별한 경험이 있었던 만큼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냥 제 해석에 동조하기보다는 이런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자기만의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타래를 작성했습니다. 이제 저는 트위터에서 더 이상 거창하게 ’타래’라는 명칭까지 달아가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대한 글을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타인의 작품을 해석하고 해설하는 것은 이 타래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를 하고자 합니다.
더 이상은 온전한 감상의 경험을 해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창작과 같은 다른 영역에 더 힘을 쏟아붓고자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인간에게 감사하며, 지금까지의 모든 글들을 마무리 합니다. 지금까지 길고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타래에서도 〈파워퍼프걸〉로 서비스 서비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