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영화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면 <수색자>라는 영화를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서부극 거장 ‘존 포드’가 감독을 맡았고, 존 포드의 페르소나이자 미국 서부극의 아이콘 ‘존 웨인’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른바 ‘걸작’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에서 존 웨인이 연기한 캐릭터 ’이든 에드워즈’는 서부극 영화 속 카우보이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모자, 기능미 충실한 가죽 조끼, 술이 달린 두꺼운 가죽 구두와 리볼버 권총까지, ’카우보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 캐릭터가 바로 이든 에드워즈입니다.
존 포드 감독의 영화 <수색자>는 앨런 르 메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 <수색자>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코만치 부족에게 납치를 당한 아내와 딸을 수색해 구출한 전설적인 카우보이 ’브릿 존슨’의 일화를 바탕으로 쓰여졌죠. 그런데 실제 일화와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영화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브릿 존슨은 존 웨인이 연기한 이든 에드워즈와 달리 백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브릿 존슨은 흑인이었습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수색자>의 원형이 된 인물이 흑인이었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카우보이의 상당수가 흑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서 낭만적인 방랑자이자 전사로 묘사되는 카우보이의 이미지와 달리 역사적으로 카우보이는 더럽고 힘들다는 인식이 있어 기피되는 직업 중 하나였고, 그래서 카우보이의 대부분은 히스패닉과 같은 이주민과 흑인들이었습니다. 특히 1860년대 남북전쟁이 끝난 후 많은 흑인들이 자유와 직업을 찾아서 서부로 이주해 카우보이가 되었는데, 이들을 성경 속 출애굽기(Exodus: 정경 구약성경의 두 번째 책으로 모세가 노예가 된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에 빗대어서 ’엑소더스터스’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카우보이’하면 백인 마초가 떠오르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미디어 탓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른바 ‘문명화’ 된 동부 백인의 입장에서 개척이 덜 이루어진 서부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판타지의 영역이었고, 이를 노려 서부에서 활약하는 이들의 과장되고 부풀려진 영웅담들이 소설, 연극 등으로 만들어지며 훗날 서부극이라는 영화 장르의 바탕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백인이 아니었던 인물들은 백인으로 수정되었으며, 영화라는 강력한 대중매체를 만나면서 ’백인 영웅으로서의 카우보이’는 공고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백인 영웅 카우보이는 영화라는 미디어가 완성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를 통해 흑인 카우보이를 재현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이렇듯 백인들이 중심이 된 미디어 산업은 의도적으로 흑인들을 소외시켜 왔습니다. 상당수의 카우보이들이 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우보이는 백인 영웅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날조된 것과 같은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엘비스 프레슬리가 아닐까 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백인이 흑인 음악을 부른다’는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배즈 루어만의 영화 <엘비스>에서도 이런 맥락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던 톰 파커 대령은 노래 잘하는 흑인이 나왔겠거니 하고 있다가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이 백인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엄청난 보석을 발견했다는 듯 라디오로 다가갑니다. 같은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백인들이 흑인들의 문화를 전유한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백인 중심의 대중문화 산업이 흑인들의 문화를 전유한 사례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 본격적으로 영화
주인공 O.J.와 에메랄드라는 이름은 각각 오즈, 에메랄드를 연상시킵니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주프는 어린 시절 시트콤 촬영 현장에서 벌어진 끔찍하고 잔혹한 사건 속에서 어떤 ’기적’을 발견하는데, 그 기적이란 수직으로 세워진 소녀의 구두입니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잊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인데 이 장면은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의 집에 깔려 죽은 사악한 마녀의 동쪽 마녀의 시체를 연상시킵니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런 <오즈의 마법사> 코드는 조던 필 감독이 관객들에게 보내는 게임 초대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더 많은 레이어가 감춰져 있으니 관객들이 스스로 그 레이어를 밝혀내 보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식으로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영화는 많습니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작품에 더 많은 의미가 담긴 것처럼 보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으니까요.
초대장에 응해 <오즈의 마법사>를 통해
시간이 흐른 지금, <오즈의 마법사>를 보는 현대의 관객들은 양가적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오즈의 마법사>는 헐리우드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영화이지만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오즈의 마법사>에 얽힌 어두운 비화들이 많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도로시 역을 맡은 주디 갈란드는 영화를 찍기 위해서 강도 높은 다이어트를 해야 했고, 각성제와 수면제를 번갈아 먹거나 담배를 피워서 몸을 망가뜨리길 강요 당했습니다. 감독과 주변 배우들이 주디 갈란드를 학대했다는 사실도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오즈의 마법사>는 헐리우드 영화 산업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냅니다. 영화 산업의 기반은 착취라는 것.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오즈의 마법사> 속 ‘The Jolly old land of Oz’ 장면인데, 카메라의 컷 전환이 이뤄질 때마다 말의 색깔이 바뀌는 마법이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당대 기준으로) 대단히 화려하고 환상적인 장면이지만, 이 장면의 바탕에는 동물 연기자와 스태프들의 착취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The Wizard of Oz (1939) The Jolly old land of Oz
’미디어는 야만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견에 선뜻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착취 바탕의 영화 제작 환경은 대중문화를 위시한 미디어 산업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입니다. 미디어의 야만성은 단순히 제작 환경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미디어가 수용자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도 야만성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감각적응 현상 때문입니다. 단맛에 익숙해지면 기존의 단맛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강한 단맛을 찾게 되는 것처럼, 자극에 익숙해진 수용자(관객)들은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됩니다.
사람들은 영화나 만화, 소설 같은 엔터테인먼트 미디어를 소비할 때 좋은 주제나 의도를 위해서 소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엔터테인먼트를 찾을 때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재미입니다. 좋은 주제나 의도와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후순위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주제를 담고 있어도, 좋은 의도로 만들어져도 재미가 없다면 소비되지 않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소비되는 것이 엔터테인먼트 미디어의 목적이기 때문에 소비되지 않는다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합니다. 일단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만 소비될 수 있기 때문에, 엔터테인먼트 미디어는 점점 더 원초적인 자극을 쫓게 됩니다.
’미디어라는 짐승’이라는 표현은 비유가 아닙니다. 엔터테인먼트 미디어는 정말 동물과도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만들어진 미디어는 생명력을 얻습니다. 작품이 창작자의 손을 떠나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통제를 벗어나는 일은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니체의 초인 사상은 게르만족 우월주의를 옹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니체는 게르만족 우월주의를 혐오했지만) 나치에 의해 악용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미디어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바로 ’밈’입니다. 창작자의 의도를 벗어난 해석은 ’밈’이 되어 사람들에게 퍼지곤 합니다. 그런데 밈이 퍼지는 방식 또한 엔터테인먼트 미디어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재밌거나 자극적이거나 혹은 둘 다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밈은 점점 더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형태로 변해갑니다.
이런 미디어의 동물적인 속성을 비유가 아니라 진짜 동물로 만든다면 그것이 바로
동물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초능력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주피터 파크’를 운영하는 주프는 어린 시절의 촬영 현장 대참사에서 살아남은 경험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이 동물과 교감하고 통제할 수 있다 믿게 된 인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초능력은 없습니다.
동물을 부리는 것은 초능력 같은 ’기적’에 의존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동물의 습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해 길들이는 것이죠. 헤이우드 목장에서 말을 길들이는 것을 가업으로 삼아온 O.J.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O.J.는 말을 길들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진 자켓을 길들이려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진 자켓이 엔터테인먼트 미디어이며, 엔터테인먼트 미디어는 동물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O.J.와 에메랄드가 진 자켓에 맞서는 이유는 가족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헤이우드 목장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하얀색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괴물’ 진 자켓의 습성들을 이용해 진 자켓에 맞서기로 합니다. O.J.와 에메랄드가 진 자켓과 맞서는 장면은 스펙터클하고 웅장하며, (에드워드 마이브릿지의 흑인 기수 영상을 포함해) 수많은 고전 영화들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이 진 자켓에 맞서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보입니다.
이들의 사투는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주제들과 연결됩니다. 이들이 진 자켓에 맞서 싸우는 이유는 헤이우드 목장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헤이우드 목장이 중요한 이유는 백인 중심의 헐리우드 영화 산업 속에서도 영화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흑인 영화사의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투는 하나의 퍼포먼스로서 지금까지 헐리우드 영화 산업에 의해 지워지고 잊혀진 흑인 영화의 역사를 다시 호출합니다.
에메랄드가 마침내 진 자켓을 쓰러뜨렸을 때, 그리고 이것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을 때, 죽은 줄 알았던 O.J.는 전설 속의 영웅처럼 ’저 너머’에서 다시 말을 타고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O.J.라는 인물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라, 잊혀지고 지워졌던 흑인 영화사의 역사가 다시 부활해 저 너머에서 돌아오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